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 , 742.4.2~814.1.28]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재위 768~814). 카를 대제 또는 카롤루스 대제라고도 한다. 부왕 피핀이 죽은 뒤 동생 카를만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였으나, 771년에는 동생 역시 죽어 단일 통치자가 되었다. 772년부터 804년까지 몇 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여 작센족의 정복,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병탄,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사라센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에스파냐 국경에 변경령()의 설치, 바이에른족 토벌, 그 부족의 태공() 타시로 폐위, 바이에른과 케른텐 병합, 아바르족 ·벤드족 정복의 업적을 이루고,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이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각 부족이 시행하던 부족법전을 성문화()하여 각 부족의 독립성을 인정하였고, 아울러 중앙에서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적 지배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지방봉건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세 여러 봉건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 실력을 배경으로 로마 교황권과 결탁하여 그리스도교의 수호자 역할을 하여 서유럽의 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였다.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서 대관()되었는데, 이 사건은 서유럽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영향에서 명실공히 완전히 독립한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로마 고전문화의 부활을 장려하여 아헨의 궁정을 중심으로 알쿠인, 파울루스 디아코누스 등 성직자들이 활약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의 3요소로 이루어지는 유럽 문화가 샤를마뉴 시대에 이르러 개화()되어, 유럽의 역사적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전기()는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의 《카를대제전》 등 몇 편이 있고, 점차적으로 이상화 ·우상화되어 ‘샤를마뉴 전설’이라고 불리는 사상적 ·문학적 전승을 이루게 되었고, 중세 무훈시()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카뮈[Camus, Albert , 1913.11.7~1960.1.4]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1913년 11월 7일 알제리 몽드비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버지가 마른 전투에서 전사하자,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빈곤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는 평생의 스승이 된 J.그르니에를 만났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며, 이때 이미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고민, 존재의 부조리성() 문제 등이 서정적인 에세이풍으로 서술되었다. 1942년 7월, 프랑스는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그의 문제작 《이방인() L’étranger》(1942)은 발표되자, 칭송과 함께 그를 일약 문단의 총아()로 만들어 놓았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1942)이다. 《이방인》이 부조리의 사상을 ‘이미지’로써 펼쳐 보인 것이라면, 《시지프의 신화》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신화상의 인물 시지프(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부조리에 반항하면서 살아야 하는 숙명임을 강조하였다. 희곡 《오해()》(1944) 《칼리굴라 Caligula》(1945)에서도,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역설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 《콩바》지()의 주필로서 레지스탕스의 필봉()을 들었다. 사르트르는 “나보다도 카뮈가 훨씬 더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회고한 일도 있다.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1945)는 전시 중에 썼던 4편의 서간형식의 ‘독일인론()’으로서, 편협한 애국심의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그 후 《페스트》(1947)는 그의 명성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이것은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암시하면서 페스트의 유행과 싸우는 선의()의 사람들의 행동을 단순 명쾌한 문체와 힘찬 필치로써 그렸다. 희곡 《계엄령》(1948)은 《페스트》의 주제를 극화한 것이다. 시사평론을 쓰면서 연극을 상연하여 청년층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그를 실존주의자로 보는 세상 사람들과 매스컴에 대해서는 항상 그것을 부정했으며, “실존주의가 끝난 데서부터 나는 출발하고 있다”라고 그는 언명하였다. 그러므로 《반항적 인간》(1951)을 둘러싸고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여 10년 가까이 맺어온 우정에 파탄이 갔다는 사실이 뜻밖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희곡 《정의()의 사람들》(19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1956)은 깊은 내성()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최초의 본격적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카이사르[Caesar, Gaius Julius , BC 100.7.12~BC 44.3.15]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 로마 출생. 시저라고도 한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의 하나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 : 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그후 패주하는 폼페이우스롤 쫓아 이집트로 향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했고, 카이사르는 그 곳 왕위계승 싸움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전쟁이 발발하였다(BC 48년 10월∼BC 47년 3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이어서 BC 47년 9월에는 소아시아 젤라에서 미트리다테스대왕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격파하고, 이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유명한 보고를 원로원으로 보냈다. 이어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속주인 아프리카 탑소스에서 소탕하고(BC 46년 4월) 오랫동안 공화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원 지배를 완전히 타도하였다. 다시 BC 45년 3월에는 에스파냐의 문다에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BC 49년 이래의 내란의 막을 내렸다. 이로써 1인 지배자가 된 그는 각종 사회정책(식민 ·간척 ·항만 ·도로건설 ·구제사업 등), 역서의 개정(율리우스력) 등의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종신 독재관을 비롯한 각종 특권과 특전이 그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권력이 한 몸에 집중된 결과, 왕위를 탐내는 자로 의심을 받게 되어 M.J.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주모자로 하는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BC 44년 3월 15일). 그러나 카이사르가 취한 방향, 즉 도시국가에서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게 된 로마를 지배 ·통치하는 데는 강력한 한 사람의 힘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 즉 군사독재의 필연성은 그의 양자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 의한 제정()의 수립으로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항상 운명의 여신과 함께 있다고 확신한 카이사르는 ‘운명의 총아’로 구가되었다. ‘인사()를 다하고 운명의 여신의 도움을 바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카이사르였다. 그는 또 자신의 정적()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인자한 사람’으로도 알려졌다. 카이사르가 인정이 많은 것은 그의 본성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책적 의도에 의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어떻든 간에 융화적인 자세는 자신의 세력권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돈을 빌리는 천재라고 일컬어진 그는 또한 인간적 매력도 풍부하여 뛰어난 웅변술과 함께 인심을 모으기에 충분하였다. 실전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군략을 짜내는 장군으로도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인심의 향방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민중파 정치가로서 사회개혁의 실효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1급의 문인으로도 알려졌다. 《갈리아 전기()》 《내란기》는 간결한 문체와 정확한 현실파악 등으로 라틴 문학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공화정권의 파괴자, 또는 반대로 제정의 초석을 굳힌 인물 등, 정치가로서의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는 구구하다. 풍부한 인간성, 그의 최후의 비극성 등 그 인간상에 대하여도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으로 다루어졌다.

 

칸트[Kant, Immanuel , 1724.4.22~1804.2.12]

  독일의 철학자.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그 이전의 서유럽 근세철학의 전통을 집대성하고, 그 이후의 발전에 새로운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 영향은 여러 가지 형태로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으며, 근세 철학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마구() 제조업자인 아버지와 경건하고 신앙심 두터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루터교 목사가 운영하던 경건주의학교에 입학하여 8년 6개월 동안 라틴어 교육을 받은 후 고향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모교의 교수로 일생을 마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온 변경()의 소시민 가정에서 장성한 칸트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계몽적인 시민육성책의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지리적 ·역사적 조건이 그의 철학으로 하여금 독일적 특수성을 떠나 참다운 ‘세계시민적’인 철학이 되게 하였다. 대학 재학 중에는 당시의 신사상이었던 뉴턴역학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 모교의 강사직을 얻은 1755년에 《천계()의 일반자연사와 이론 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 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뉴턴역학의 모든 원리를 확대 적용하여 우주의 발생을 역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는데, 후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로 널리 알려지게 된 획기적인 업적을 수립하였다. I.뉴턴의 방법의 철저한 적용이라는 이 대담한 시도는 목적론적 세계관에의 귀의()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그것의 바탕 위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일면을 지닌다. 여기의 내포되는 모순이 의식에 떠오른다면 그것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함을 뜻할 것이다. 이 위기에서 칸트를 구한 것은 J.J.루소이다. 그는 칸트로 하여금 문명에 침식되지 않은 소박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눈뜨게 하고, 여기에다 그 후의 모든 사상적 노력의 숨은 기초를 뿌리박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뉴턴, 루소를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D.흄을 부정적 매개체로 하여 중세 이후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그 밑뿌리까지 파고들어 전면적 재편성을 시도함으로써 비판철학을 탄생시켰다. 그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 에서 뉴턴의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한 인식구조에의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종래의 신()중심적인 색채가 남아 있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이 모두 인간 중심적인, 즉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학적인 의미로 바뀌어야 되는 이유를 들고, 나아가 일반적 ·세계관적 귀결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인식이 성립되는 장면을 해명해야 할 인간학적 형이상학을 새로 수립하는 일을 통하여, 종래의 신적 형이상학()이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제2의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에서 칸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율적 인간의 도덕을 논하고, 실천의 장()에서의 인간의 구조에 ‘불가결한 요청()’이라는 형태로 신() ·영세() 등의 전통적 형이상학의 내실을 재흥시켜 그것이 새롭게 인간학적 철학에서 점유할 위치를 지적하였다. 종교를 도덕의 바탕 위에 두는 이 구상()은 그 후의 《종교론》(1793)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상 두 가지 비판서로 명백하게 된 인식과 실천이라는 두 개의 장면을 매개하고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장()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인간학적 철학을 종결짓고자 구상된 것이 제3의 비판서인 《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다. 여기서 칸트는 미()와 유기체()의 인식이라는 장면의 분석을 통하여 목적론적 인식의 구조를 명백히 하고, 또한 목적론과 기계론의 관계라는, 일생의 과제이며 동시에 세기적 과제에 비판적 해결을 부여하여 스스로의 철학적 노력을 결말지은 것이다. 이상 3권의 비판서에 의하여 그 토대가 놓여진, 비판철학 사상과 밀접히 관련하여, 또는 그 위에 기초한 사고()를 전개한 기타의 주요 저서로는 《순수이성비판》의 해설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롤레고메나 Prolegomena》(1783), 《실천이성비판》에 앞서 비판적 논리학의 기본구상을 기술한 《도덕형이상학원론()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이것에 기초한 법철학 ·도덕철학의 구체적 체계를 전개한 《도덕형이상학 Metaphysik der Sitten》(1797), 그 자매편으로 자연철학의 체계를 전개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원리》(1786)가 있다. 또 오랜 기간의 강의를 정리하여 출판한 《인간학》(1798) 《자연지리학》(1802)은 칸트의 폭넓은 실제적 지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칸트의 철학은 3권의 비판서 간행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예나를 비롯한 몇 곳을 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독일의 대학 ·논단을 석권하였고, J.G.피히테에서 G.W.F.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선두 주자로서, 또 그 모태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 영향은 다시 영국 ·프랑스의 이상주의철학까지 미쳤으며, 특히 후일의 독일 신()칸트학파의 철학은 칸트의 비판주의의 직접계승을 지향한 것이었다. 또한 신칸트학파 퇴조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철학 조류도 모두 직접 ·간접으로 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칼뱅[1509.7.10~1564.5.27]

  프랑스의 신학자 ·종교개혁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에 의해 복음주의적(),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政政)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콜럼버스[Columbus, Christopher , 1451.8.26?~1506.5.21]

  탐험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이탈리아명은 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이다.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지만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1484년 포르투갈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계약내용은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로 하여금 선박 2척(핀타호와 니냐호)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팔로스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섬(추정)을 발견하였다. 이어,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도달하여, 이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히스파니올라에다 약 40명을 남겨 식민시켰다. 그러나 그 사이에 핀손과 사이가 나빠져,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자는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들에게는 공납()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 문책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1500)에서는 트리니다드와 오리노코 하구()를 발견하였으나,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였으며, 그의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1506년 ‘이미 과거의 인물’이 된 채 죽었는데, 자기가 발견한 토지를 인도라고 믿고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서양 사람에 의한 아메리카대륙 발견은 1000년경 노르만인()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의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대륙이 유럽 사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을 구축하게 된 점에서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쿠베르탱[Coubertin, Pierre de , 1863.6.1~1937.9.2]

  근대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 프랑스 파리 출생. 명문 출신 남작이며, 조상은 로마의 귀족이었다. 처음 군인이 되기 위하여 생시르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독일을 공공연한 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에 반대하여 16세에 중퇴하고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 유학 중 영국 청소년교육의 중심이 스포츠에 있다는 데 공명()하였다. 그 이념을 모국에 이식하고자 1886년 문교상()에게 교육에서 스포츠의 중요성을 건의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조국 프랑스의 이단자로 일생을 냉대받게 되었다. 1892년부터 올림픽 부흥운동을 시작하여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창설하였으나, 이에 협력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니고 타국의 정치가 ·학자 ·스포츠맨이었다. 1896년 제1회 근대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하고, 그 후 ICO 회장으로 올림픽의 발전과 운동 추진에 일생을 바쳤다. 그는 ICO 외에도 국제 교육학회를 창설하여 스포츠와 교육의 연관성을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로잔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명예시민으로 살았다.

 

쿠빌라이[ , 1215~1294]

  몽골제국 제5대 칸[]이며, 중국 원()나라의 시조(재위 1260∼1294). 이름 쿠빌라이.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고비사막 남쪽의 금연천(:뒷날의 )을 근거지로 삼고 지금의 중국 윈난성[]에 있던 대리국()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도 경략하였다. 그리고 형주분지(:)에 안무사(), 허난[]에 경략사(), 경조분지(:西)에 선무사()를 두고, 중국의 통치에 타고난 재질을 보였다. 1244년 유생() "왕악"을 고비사막 이북 지역(현재의 )으로 초청하는 등 일찍부터 한()나라 문화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1253년부터는 성리학자() 왕순()에게 명하여 맏아들 친킴[]의 교육을 맡겼다. 그리하여 그의 휘하에는 유병충(), 요추(), 허형() 등 특별히 성리학계의 중국 지식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1259년 남송()을 몸소 무찌르던 형 몽케칸이 쓰촨[]의 병영에서 병사하였다. 쿠빌라이는 국도()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의 야망에 선수를 써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에서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국식으로 건원()하여 중통()이라 하였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으로 옮겨 대도()라 일컫고, 이어 1271년 《역경()》에 입각하여 나라 이름을 원이라 하였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룬 것은 1279년의 일이다. 그러나 아리크부카의 잔당인 하이두(오고타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 고손자)의 반란을 계기로, 몽골제국의 분열이 일어났다. 30여 년에 걸친 동서 두 칸의 실력항쟁기(1268∼1303)를 통하여, 원나라는 뱃길로 일한국(:이란)과 친교를 계속하는 일만으로써 세계 제국의 면목을 유지하였다. 세조는 35년간의 치세에서 안으로는 툴루이가() 분지()의 실력가인 진정()의 사()씨와 고성()의 동()씨의 협력하에 끈질긴 한인()의 세습적 봉건제후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또 금()나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관제()를 정하고 세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미얀마·참파·자바·일본 등을 쳐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그 영역 안에 넣었다. 다만 외정()의 강행으로 말미암은 재정난의 증대는 세조가 이재()의 신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아하마(이슬람교도), 노세영(:)·상가(위구르인?) 등, 주로 색목인() 계통의 상인적 정치가의 활약을 허용하였다. 세조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성종()은, 일찍 죽은 황태자 친킴의 아들이다.

 

퀴리 부인[Curie, Marie , 1867.11.7~1934.7.4]

  프랑스의 물리학자·화학자. 폴란드의 바르샤바 출생. 결혼 전 이름은 Marj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대학에 입학, J.H.푸앵카레, G.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으며,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895년 P.퀴리와 결혼 후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잇달아 발견된 시기였는데, 뢴트겐의 X선 발견, H.베크렐의 우라늄 방사능 발견에 자극되어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먼저 베크렐의 추시부터 시작, 이때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썼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보다 편리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 불렀다. 또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가지 시료()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고, 그 속에 미지()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했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 대하여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어 그 해 12월 라듐을 발견하였다. 이 두 원소는 방사성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 발견은 방사성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성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이 후 단독으로 방사성물질을 계속 연구, 1907년 라듐 원자량의 보다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고, 1910년에 금속 라듐의 분리에도 성공하였다. 그 동안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대학 교수가 되었고, 라듐연구소 건립에도 노력하였다. 이것은 그 후 파스퇴르실험소와 퀴리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은 마리의 실험조수로 있던 F.졸리오 퀴리와 결혼,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방사능 발견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지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크롬웰[Cromwell, Oliver , 1599.4.25~1658.9.3]

  영국의 정치가. 청교도혁명 당시 국왕 찰스 1세에 맞선 의회진영의 장군. 잉글랜드 동부 헌팅턴 출생. 상류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헌팅턴의 그래머스쿨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 후 런던의 링컨즈 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620년 결혼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소유한 영토관리에 전렴하였다. 이 무렵 신앙에 눈을 떠 회심()을 경험하게 되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628년 헌팅턴 출신의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1629년 의회가 해산되자 소유 영지를 처분한 다음 세인트 아이브스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일리로 옮겼다. 1640년의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 때는 케임브리지에서 선출되어 18개의 위원회에 관계함으로써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642년 제1차 내란이 일어나자 의회군의 장군 에식스 백작(제3대)과 더불어 기병대를 이끌고 종군하여 에지힐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후로는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규율과 장비를 갖춘 우수한 기병연대를 편성하여, 1644년 동부 연합군 부사령관이 되어 마스턴무어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의 군대는 철기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1645년 이 철기대를 본떠서 전군을 개혁하여 새로운 모범군을 편성하고, 페어팩스의 부사령관이 되어 네이즈비전투에서 왕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해 1647년 왕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의회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틈을 타서 왕이 탈주하여 제2차 내란이 1648년에 일어나자, 그는 웨일스로 원정하여 침입하여 오던 스코틀랜드군을 프레스턴에서 격파하였다. 1649년 반혁명의 뿌리를 뽑기 위해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왕제와 귀족원을 폐지하여 ‘공화국 ·자유국가’를 선언하는 한편, 좌익의 수평파()와 진정() 수평파를 탄압하였으며, 1649년에는 왕당파()의 거점인 아일랜드를 원정하였다. 1653년 장기 의회를 해산하였으며, 그 후에 성립된 추천의원으로만 구성된 지명() 의회가 너무 급진적인 성격을 띠자 이것마저 해산시키고, 그 자신이 호국경()의 지위에 올라 통치장전()을 제정하여 호국경 정치를 시작하였다. 1654년 왕당파의 음모가 폭로되자, 1655년 전국을 10군구(), 후에 다시 11군구로 구분하여, 이 곳에 각각 군정 장관을 배치하여 군사독재정치를 감행하였다. 1657년 그에게 왕관이 주어졌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타고르[1861.5.7~1941.8.7]

  인도의 시인 ·철학자 ·극작가 ·작곡가. 캘커타 출생. 골 명문의 대성()이라 불리는 아버지 데벤드라나트의 15명의 아들 중 열넷째 아들로, 형들도 문학적 천분이 있었고, 타고르가()는 벵골 문예부흥의 중심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1세경부터 시를 썼고, 16세 때 처녀시집 《들꽃》을 내어 벵골의 P.B.셸리라 불렸다.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학적 교양을 닦고, 1877년 영국에 유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며 유럽 사상과 친숙하게 되었다. 귀국 후 벵골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동시에 스스로 작품의 대부분을 영역하였고, 산문 ·희곡 ·평론 등에도 문재를 발휘하여 인도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1891년 아버지의 명령으로 농촌의 소유지를 관리하면서 가난한 농민생활과 접촉하게 되어 농촌개혁에 뜻을 둠과 동시에, 작풍에 현실미를 더하게 되었다. 아내와 딸의 죽음을 겪고 종교적으로 되었으며, 1909년에 출판한 시집 《기탄잘리》로 1913년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아 세계에 알려졌다. 그뒤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동서문화의 융합에 힘썼고, 캘커타 근교에 샨티니케탄(평화학당)을 창설하여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벵골분할 반대투쟁 때에는 벵골 스와라지 운동의 이념적 지도자가 되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가 세운 학당은 1921년에 국제적인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오늘날에는 국립대학이 되었다. 시집에 《신월() The Crecent Moon》 《원정() The Gardener》(1913) 등, 희곡에 《우체국 The Post Office》(1914) 《암실의 왕 The King of the Dark Chamber》(1914), 소설에 《고라》(1910) 《카블에서 온 과실장수》, 평론에 《인간의 종교》 《내셔널리즘 Nationalism》(1917) 등이 있다. 벵골 지방의 옛 민요를 바탕으로 많은 곡을 만들었는데, 그가 작시 ·작곡한 《자나 가나 마나 Jana Gana Mana》는 인도의 국가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M.K.간디와 함께 국부()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한편,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시, 《동방의 등불》 《패자()의 노래》를 남겼다. 그 중 《패자의 노래》는 최남선()의 요청에 의하여 쓴 것이고, 다음에 전문을 든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 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주요한 옮김. 1929.4.2.《동아일보》).

 

토인비[Toynbee, Arnold Joseph , 1889.4.14~1975.10.22]

  영국의 역사가, 문명평론가. 런던 출생. 경제학자 A.토인비의 조카. 옥스퍼드대학에서 고전고대사를 전공하고 왕립 국제문제연구소 연구부장, 런던대학 국제사 연구교수, 외무성 조사부장을 역임하고 런던대학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56년 CH()의 서열에 올랐다.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거시적 입장에서 집필한 필생의 역작 《역사의 연구》(12권, 1934∼1954,1959,1961)에서 많은 문화유형을 고구()하여 세계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독자적인 문명사관()을 제시하였다. 그리스 이후 쇠퇴하였던 역사의 반복성에 빛을 부여함으로써 고대와 현대 사이에 철학적 동시대성()을 발견하고 역사의 기초를 ‘문명’에 두었다. 문명 그 자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포착하고, 그 생멸()이 역사이며, 그 생멸에 일정한 규칙성, 즉 발생 ·성장 ·해체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26개의 문명권을 병행적 ·동시대적으로 나열하고, 이들 모두가 규칙적인 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한편, 문명의 추진력을 고차문명()의 저차문명()에 대한 ‘도전’과 ‘대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보았다. 이 밖에 ‘내적 ·외적 프롤레타리아트’, ‘세계교회’ 등 특수한 용어에 의한 개념이 사용되고 있는데, 19세기 이후의 전통사학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역사학의 길을 개척한 점에서 크게 주목되었다. 그 밖의 저서로 《Nationality and War》(1915) 《Greek Historical Thought》(1924) 《A Survey of International Affairs》(1924∼1938) 《Civilization on Trial》(1948) 등이 있다.

 

톨스토이[Tolstoi, Lev Nikolaevich , 1828.9.9~1910.11.20]

  러시아의 소설가 ·사상가.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 출생.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존재였다.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로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졌다. 1851년 형의 권유로 군대에 들어가 카프카스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고, 다음해 처녀작 《유년시대 Detstvo》(1852)를 익명으로 발표하여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소년시대 Otrochestvo》(1854)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iskie Rasskazy》(1854∼1856) 등은 군에 복무하면서 집필한 작품들로서 1855년 군에서 제대하고 수도로 올라갈 무렵에는 이미 청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857년 서유럽 문명을 시찰하기 위해 국외에 나갔으나 실망하고 귀국하여, 인간생활의 조화를 진보 속에서 추구하던 그는 그 후 내성적인 경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62년 궁정 시의()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하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 Voina i mir》(1864∼1869)를 발표, 이어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3∼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로서 《교의신학비판()》(1880) 《요약 복음서》(1881) 《참회록 Ispoved’》(1882) 《교회와 국가》(1882) 《나의 신앙 V chem moya vera?》(1884)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갔다. 이 전향 후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사해동포 관념에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 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882년 모스크바 빈민굴을 시찰한 후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사상적 번민은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 그 후 그의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와 친교가 있어 4,000명에 달하는 이 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부활 Voskresenie》(1899)이다. 그는 수년 전부터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를 집필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문학관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으나, 《부활》의 집필은 앞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동방정교회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는 이유로 1901년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부활》 이후의 주요작품으로는 《신부() 세르게이》(1898), 희곡 《산송장》(1900), 단편 《무도회의 뒤》 《병 속의 아료샤》(1905)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종교와 도덕〉(1894) 〈톨스토이즘에 대하여〉(1898) 〈현대의 노예제도〉 〈자기완성의 의의〉(1900) 〈유일한 수단〉(1901) 〈세 가지 의문〉(1903) 〈셰익스피어론()〉(1903) 〈유년시대의 추억〉(1904) 〈러시아 혁명의 의의〉(1906) 〈마을의 노래〉(1909), 그리고 최후의 대작 《인생의 길》(1910) 등을 들 수 있다. 전향 후 그의 생활신조는 전술한 대로 재산과 저작권의 포기는 가족에게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반면 세상에서는 그를 위선자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어 그가 성명했던 본래의 뜻대로 실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종종 한 집에서 기거를 같이했던 그의 고제() 첼트코프에 대한 부인의 질투와 증오도 가정생활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다. 1890년에 발표된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는 이러한 내적 고민을 선명하게 그렸다. 그는 자신의 가정생활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몇 차례 가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서 병을 얻어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투탕카멘[Tutankhamen , BC 1370~BC 1352 ?]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파브르[Fabre, Jean Henri , 1823.12.23~1915.10.11]

  프랑스의 곤충학자 ·박물학자. 남프랑스의 아베롱현() 생레옹 출생. 빈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카르팡트라스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몽펠리에대학에서 물리 ·수학을 배운 후 1849년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중학의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4년 후에 아비뇽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에 임명되었으며, 이학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854년 31세 때의 겨울 레온 뒤프르의 소책자를 읽고 감명을 받아, 곤충연구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이듬해 노래기벌의 연구를 발표하였고, 얼마 후에 아비뇽의 르키앙박물관장에 임명되었으며, 1886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관학파(훈구파)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교단과 박물관장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였으며, 과학보급서를 저술하였음에도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878년 마지막 거처인 세리냥의 아르마스로 이사하여, 그 유명한 《곤충기() Souvenirs entomologiques》(10권, 1879∼1907)를 출판하였다. 1910년에 파브르 후원회가 설립되었으며, 스톡홀름 학사원()에서는 린네상을, 프랑스 정부는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였다.

 

파스칼[Pascal, Blaise , 1623.6.19~1662.8.19]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 사상가.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페랑 출생. 3세 때 어머니와 사별하고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왔다. 학교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으로 유클리드기하학()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16세에 《원뿔곡선 시론()》을 발표하여 당시의 수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사영기하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정리》는 이 시론에 포함되어 있다. 1604년 아버지와 함께 루앙으로 옮겨, 세무장관이던 아버지가 하는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계산기를 고안, 시작()하였다. 루앙에 있을 때 얀센주의의 신앙혁신운동()에 접하여 최초의 회심을 경험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토리첼리의 실험을 행한 이래, 진공()에 관한 문제, 유체정역학()에 관한 문제에 흥미를 가졌고, 마침내 《진공에 관한 신실험()》을 발표하였다. 1647년 질병의 진단을 받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그 무렵 귀국 중에 있던 R.데카르트의 방문으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처남 페리에에게 부탁한 퓌드돔 산정()의 실험에 의해 대기의 압력을 확인하였다. 165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여동생 자클린이 포르 루아얄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과는 달리, 파스칼은 로아네스공(), 슈발리에 드 메레 등과 친교를 맺고 사교계에 뛰어들어 인생의 기쁨을 추구하였다. 노름에서 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해주는 문제에서 확률론을 창안하여, 《수삼각형론()》 및 그 《부대논문()》을 썼다. 파스칼은 이 논문으로 수학적귀납법의 훌륭한 전형()을 구성하였으며, 수의 순열 ·조합 ·확률과 이항식()에 대한 수삼각형의 응용을 설명하였다. 또 물리실험의 결과를 《유체의 평형》 《대기의 무게》라는 두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초등 물리학에서 나오는 ‘파스칼의 원리’는 《유체의 평형》 속에 포함되어 있다. 1654년 여름부터 사교계에 대한 혐오감이 점점 싹텄고, 11월 23일 깊은 밤, 결정적인 회심의 환희를 체험하고 포르 루아얄 수도원의 객원()이 되었다. 이 점은 수녀인 여동생 자클린에게서 입은 감화가 컸다고 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하여》 《초기의 그리스도 신자와 오늘의 그리스도 신자의 비교》 《요약() 예수 그리스도전》 등의 소품은 바로 그 무렵의 저작이다. 또 포르 루아얄 데샹에서는 《드 사시씨()와의 대화》를 남겼다.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예수회와 포르 루아얄에 모인 얀센파 사이에 신학상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파스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논쟁에 말려들었다. 그는 《시골 친구에게 부치는 편지(프로뱅시알)》라는 제목의 서한체()의 글을 익명으로 속속 간행하여 예수회 신학의 기만을 폭로하는 한편, 그 오만불손한 윤리를 공격하였다. 1656년 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18편의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파스칼은 이 서한문에서 구사한 경쾌하고 솔직한 표현에 의해 프랑스어에 새로운 문체()를 도입한 결과가 되었다. 1658년 우연한 동기에서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해결하고 적분법()을 창안해 냈다. 《사이클로이드의 역사》 《삼선형론()》 《사분원()의 사인론[]》 《원호론()》 《사이클로이드 일반론》 등 일련의 수학논문 속에 그 이론이 나타나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 정신에 대하여》 《설득술()에 대하여》 《질병의 선용()을 신에게 비는 기도》 등의 소품을 쓴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변증론()》을 집필하기 위하여, 단편적()인 초고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병고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한 채, 39세로 생애를 마쳤다. 사망 후 그의 근친과 포르 루아얄의 친우들이 그 초고를 정리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팡세 Pensées》의 초판본(1670)이다.

 

파스퇴르[Pasteur, Louis , 1822.12.27~1895.9.28]

  프랑스의 화학자 ·미생물학자. 동부 프랑스 쥐라현() 출생.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모교의 조수로 활동하였다. 최초의 연구는 1848년 타르타르산[]에 관한 것으로 타르타르산염과 파라타르타르산염의 구조상의 차이를 광회전성[]의 차이로부터 밝혀냈다. 디종중학교 물리교사를 거쳐, 1849년 스트라스부르대학 화학교수가 되었으며, 화학조성 ·결정구조 ·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입체화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때 생물이 입체이성질체의 한쪽만을 이용하여 합성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대칭성’을 논함과 동시에, 생명의 화학적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 1854년 신설된 릴대학 화학교수 겸 이학부장(), 1857년 에콜 노르말 부주사()에 취임하였다. 릴의 양조가() 비고의 의뢰를 받고 발효와 부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젖산발효는 젖산균의, 알코올발효는 효모균의 생활에 관련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어 1862년 알코올에서 아세트산으로 변하는 것과 아세트산발효에 대해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다. 또 포도주가 산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저온살균법을 고안하여, 프랑스의 포도주 제조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부패가 공기 중의 미생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자연발생설을 부인하였다. 1865년부터 J.A.뒤마의 의뢰를 받고 누에의 미립자병()과 연화병()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끝에 양잠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공헌하였다. 1867년 소르본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었으나 에콜 노르말에서 연구를 계속, 탄저병 ·패혈병 ·산욕열() 등의 병원체를 밝혀냈다. 1879년 닭콜레라의 독력을 약화한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고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 E.제너 이래 과제로 남았던 백신 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의 일반화에 성공하였다. 1881년 푸이 르포르에서의 야외실험으로 가축에 탄저병 백신을 접종하여 그 유효성을 증명하였다. 1881년 프랑스 학사회 회원, 1886년 파스퇴르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 , 1746.1.12~1827.2.17]

  스위스의 교육자.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대학교에 재학 중 애국자단체에 소속되어 사회운동에 가담하였으며, 1769년 같은 단체원이던 안나와 결혼하였다. 1771년 노이호프에 농민학교를 세웠으나 실패한 후 사색과 저술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로 밀려왔을 때 슈탄스에 고아원을 설립, 전쟁고아를 돌보았다. 그후 부르크도르프, 이베르돈에 학교를 세워 독자적인 교육방법을 실천하다가 만년에는 다시 노이호프로 돌아갔다. 당시의 유럽 사회를 분석하여, 계층간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은 정당한 교육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민중에게 바른 지성의 힘을 기르게 하면 민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인간학교의 이상을 제안하였다. 또한 바른 지성의 힘을 체질화하기 위해서 형()·수()·어()의 개념을 직관적 경험을 통해서 부여해야 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간에게 내재하는 자발성·자기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해석하고 기초도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펼쳤다. 도덕적 도야의 근원을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믿음의 관계에서 찾으면서 생활이 도야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다. 그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전생애를 통하여 온갖 고경()을 참으면서 언제나 교사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교육이라는 외길을 걸었던 강한 실천성과, 교육에 의한 인류구제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확립하여 소상히 전개한 교육적 천재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고 새겨진 묘비명은 그의 교육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 저서로는, 농민학교 운영에 실패한 후에 쓴 교육선언 《은자()의 황혼 Abendstunde eines Einsiedlers》(1780),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불후의 교육소설 《린하르트와 게르트루트 Lienhard und Gertrud》(1781~1787), 그의 근본적인 철학적·인간학적 사상이 담긴 《인류발전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에 대한 나의 탐구》(1797), 교육방법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한 《게르트루트는 어떻게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는가 Wie Gertrud ihre Kinder lehrt》(1801) 등이 있다. 또한 만년의 저서 《백조의 노래 Schwanengesang》(1826)에서는 교육이상으로서 전인적()·조화적 인간도야의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저서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신()에 대한 순수한 신앙이 그의 생활과 사상의 바탕이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표트르 대제[Pyotr I , 1672.6.9~1725.2.8]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적인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 ·조선술()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하여 정무()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의 하구()에 있는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들을 소집하여 함대()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터키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터키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써 중단되었으나, 귀국 후 즉시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하여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하였다. 1721년 원로원()은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또 ‘대제()’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여,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프루스트[Proust, Marcel , 1871.7.10~1922.11.8]

  프랑스의 소설가. 파리 근처 오퇴유 출생. 20세기 전반의 소설 중 질·양에 있어서 모두 최고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의 작자이다.아버지 아드리언 프루스트 박사는 보스 지방 출신인 위생학의 대가로 파리대학교 교수였으며, 어머니 잔은 알자스 출신의 유대계 부르주아지 집안 규수였다. 섬세한 신경과 풍부한 교양을 갖추어 모자간의 마음의 교류는 프루스트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된다. 아버지의 고향 이리에, 할머니와 피서 갔던 노르망디의 해변, 파리의 샹젤리제가 유소년기의 작가가 경험을 쌓은 장소들로 모두가 후에 소설로 옮겨져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9세 때부터 천식()에 걸렸는데, 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숙환이 되었다. 또 어떤 시기부터 자각하게 된 동성애의 습벽이 그의 인생에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리의 콩도르세중학으로 진학하여 상류사회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동인지 《향연()》을 발행하였다. 또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면서 카이야베 부인, 스트로스 부인 등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이 작가로서의 인간관찰의 안목을 길러 주었다. 《향연》 시대의 문장은 A.프랑스의 서문을 얻어 《즐거움과 그 나날》(1896)에 종합되었는데, 동료들간에서도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병약무위()하게만 보였던 프루스트가 일관하여 문학적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발굴된 방대한 미발표 원고에 의해 밝혀졌다. 《장 상퇴유》는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었는데, 1896∼1900년에 걸친 작품으로 추정되며, 또 《생트 뵈브에 거역해서》는 1908∼1910년경의 습작인데,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대성될 일관된 노력이 남긴 행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 《스왕가() 쪽으로》는 1911년경에 대체로 완성을 보았으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여 1913년이 되어 가까스로 자비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fleurs》가 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이것은 이듬해에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루스트는 비로소 연래의 꿈이었던 문학적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죽음의 예감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성을 위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일생과 바꿀 대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모두 맛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작품 외에 2권의 문집, 10여 권의 서간집과 미발표 원고가 있다.

 

플라톤[Platon , BC 429?~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형이상학의 수립자. 아테네 출생. 명문()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한 미토스(mythos:)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되는 ‘철학자’를 변호 ·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에 대한 존재, 다()에 대한 하나, 타()에 대한 동()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 ·동굴 ·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에 있으면서 참 실재()의 관조()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피카소[Picasso, Pablo Ruiz y , 1881.10.25~1973.4.8]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 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고갱, V.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1905년 G.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 BC 582 ?~BC 497 ?]

  그리스의 종교가 ·철학자 ·수학자. 에게해() 사모스섬[] 출생.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에서 비밀교단을 결성하고, 그 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당시의 밀의종교()의 형식에 따라 절제 ·질박()·심신의 단련을 목표로 하고, 신들과 양친 ·친구 ·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과 자제 ·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과를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또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그런데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로 불리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는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을 그의 교단의 휘장()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임을 확신하고, 또 중심화()의 주위에 지구와 태양 및 기타 행성이 원궤도로 회전한다는 일종의 지동설을 제창하였으나, 다른 학자들의 인정은 받지 못하였다.

 

한니발[Hannibal , BC 247~BC 183]

  카르타고의 정치가·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 제1차 포에니전쟁에 패전한 후 아버지를 따라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에서 에스파냐로 갔으며, 아버지와 매형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BC 22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에스파냐 주둔군의 총지휘관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로마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으며, BC 219년 로마군 점령하의 에스파냐 도시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이듬해 에브로강을 건너자, 로마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전쟁)의 전단()이 열렸다. 그는 육로로 이탈리아 진공계획을 세우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남프랑스를 석권하고, 다시 눈덮인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BC 217년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전투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BC 216년 칸나이전투에서는 교묘한 용병술()을 발휘하여 로마군을 철저하게 격파하였으나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점차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한 로마군에 의하여 에스파냐로부터의 원군()도 격멸당하였으며, 로마의 장군 대()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카르타고로 육박하였다. 한니발은 고국에 소환되었으며,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대패함으로써 결국 제2차 포에니전쟁도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났다. 그후 카르타고의 집정관()이 되어 로마에 대한 보복기회를 노렸으나, 정적()에 의해 시리아와의 통모()를 획책하고 있다는 통고가 로마로 보내졌기 때문에, BC 196년 그는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로마군과 싸웠으나, BC 190년 안티오코스군이 마그네시아에서 로마군에 패배하자, 그는 다시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피신하였으며, 로마가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함에 이르자 자살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피로스와 비견되는 고대사상 굴지의 전술가였다.

 

함무라비[Hammurabi , ?~BC 1750]

  바빌론 제1왕조 제6대왕(재위 BC 1792∼BC 1750). 바빌로니아를 통일한 고대 오리엔트 사상()의 영주()의 한 사람이다. 당시의 바빌로니아는 이신 ·라르사 ·바빌론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는데, BC 1787년에 이신을 토벌하고, BC 1776~BC 1768년 사이에 강적 라르사에 대승하여 림신왕을 포로로 하였으며, 유프라테스강 중류지역의 마리도 격파하여 시리아를 세력하에 두어, 엘람고원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함무라비는 정복지에 총독을 두고, 수메르 이래의 전통인, 각 도시를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의 지방분권적 경향을 억제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조직을 폈다. 이 동안에 바빌론에 성벽을 구축하고, 각지에 신전(殿)을 건립하여 신상()을 안치하고, 운하를 만들어 무역을 활발히 하는 등 국력의 충실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수도 바빌론은 오리엔트 세계의 중심으로서 번영하고, 바빌로니아는 안정되었다. 또, 아카드어()를 국어로 채용하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아카드어는 오리엔트의 국제어가 되었다. 그 밖에 달력을 통일하고, 재래의 법률을 집대성한 함무라비 법전을 발포하였다. 종교면에서는 바빌론의 한 지방신()에 불과하였던 마르둑을 최고신으로 하는 신들의 세계를 조성하였다. 이렇듯 정치적 통일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 세계가 성립되어, 함무라비시대는 후세에 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졌다.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 1770.8.27~1831.11.14]

  독일의 철학자. 칸트 철학을 계승한 독일 관념론의 대성자이다. 슈투트가르트 출생.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재무관 아들로 1788년 뒤빙겐대학교 신학과에 입학 J.C.F.휠데를린 및 F.W.셸링과 교우하였다. 졸업 후 7년간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교사를 한 뒤 1801년 예나로 옮겨 예나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미 예나대학의 교수로 활약 중이던 셸링의 사상에 동조하여 잇달아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셸링적 입장을 벗어나 1807년에 최초의 주저 《정신현상학()》을 내놓아 독자적 입장을 굳혔다. 이 무렵 나폴레옹군의 침공으로 예나대학이 폐쇄되자 밤베르크로 가서 신문 편집에 종사하였으며, 이어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 교장이 되었고, 이곳에서 둘째 주저 《논리학 Wissenschaft der Logik》(1812∼1816)을 저술하였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로 취임, 그 동안 《엔치클로페디 》(1817)를 발표하였으며, 1818년에는 프로이센 정부의 초청으로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곧 마지막 주저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1821)를 내놓았다. 베를린 시절은 헤겔의 가장 화려한 시절로서 유력한 헤겔학파가 형성되었으며, 그의 철학은 국내외에 널리 전파되었으나 1831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였다. 헤겔 철학의 역사적 의의는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의 한계를 통찰하고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눈을 돌린 데 있다. 계몽사상이 일반적으로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머리 속에서 생각한 이상에 치중, 이 이상을 현실로 실현해야 하며 또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헤겔은 현실이란 그처럼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은 그 자신의 법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정해졌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리 이상을 실현하려고 애써도 그 이상이 역사의 법칙적 흐름에 알맞게 부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 노력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에 대해 헤겔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가졌으며, 역사는 절대자 ·신()이 점차로 자기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절대자는 이성()이고 그 본질()은 자유()이다. 따라서 역사는 자유가 그 속에서 전개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며, 단 한 사람 전제군주()만이 자유이었던 고대로부터, 소수의 사람이 자유이던 시대를 거쳐 모든 사람이 자유가 되는 시대로 옮아간다. 그리하여 현대는 바로 이 마지막 단계가 실현되어야 할 시대라고 보았다. 헤겔은 이러한 근본사상을 바탕으로 장대한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는데 그 체계는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3부로 되었으며, 이 전체계를 일관하는 방법이 모든 사물의 전개()를 정() ·반() ·합()의 3단계로 나누는 변증법()이었다. 헤겔에 의하면 정신이야말로 절대자이며 반면 자연은 절대자가 자기를 외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논리학에서는 자연 및 정신에 대하여 고루 타당한 규정이 다루어졌다. 그의 철학은 그 관념론적 형이상학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과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만, 역사를 중시하였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역사주의적 경향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또 변증법이라는 사상으로도 후세에 다대한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선정한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헤로도토스[Herodotos , BC 484 ?~BC 425 ?]

  그리스의 역사가. 키케로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일생에 대해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출생하였으며, 가까운 친척인 서사시인 파니아시스가 참주() 리그다미스 2세에게 피살되자 그의 일족은 사모스섬으로 망명하였다. 나중에 귀국하였지만, 할리카르나소스에 가지 않고 BC 445년경에는 아테네로 가서 살았다. 당시의 아테네는 전성기였는데, 거기서 페리클레스·소포클레스 등과 친교를 맺었다. 시를 낭독하여 크게 인기를 얻어 아테네시()로부터 돈 10타렌트를 받았다. 그 뒤 아테네시가 BC 444년(또는 BC 443년)에 건설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무리오이로 가서 그곳 시민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여생을 마친 것 같다. 대여행을 하였다는 것은 저서 《역사》(9권)에서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여행 범위는 북으로 스키타이, 동으로는 유프라테스를 내려가서 바빌론까지, 남으로는 이집트의 엘레판티네, 서로는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키레네까지였다. 《역사》는 동서분쟁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페르시아전쟁의 역사를 쓴 것이다. 그는 신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이고, 신은 인간의 오만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페르시아의 패배도 크세르크세스 1세의 오만에 원인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역사》는 설화적인 역사로 일컬어지며, 일화와 삽화를 많이 담고 있다. 게다가 언뜻 보기로는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서사시와 비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는 정연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과거의 사실()을 시가()가 아닌 실증적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그리스인으로, 《역사》는 그리스 산문사상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헤밍웨이[Hemingway, Ernest Miller , 1899.7.21~1961.7.2]

  미국의 소설가. 1899년 7월 21일 시카고 교외의 오크파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수렵 등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을 사랑하고 종교심이 돈독한 여성이었다. 이러한 부모의 성질이 그의 인생과 문학에 미묘한 영향을 주었다. 고교시절에는 풋볼 선수였으나,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 그 가운데에는 후에 유명해진 그의 문체()의 맹아()가 이미 나타나 있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캔자스시티의 《스타 Star》지() 기자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8년 의용병으로 적십자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이 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종군 중 다리에 중상을 입고 밀라노 육군병원에 입원, 휴전이 되어 1919년 귀국하였다. 전후 캐나다 《토론토 스타》지의 특파원이 되어 다시 유럽에 건너가 각지를 시찰 여행, 그리스-터키 전쟁을 보도하였다. 파리에서 G.스타인, E.파운드 등과 친교를 맺으며 창작상의 많은 것을 배웠다. 1923년 《3편의 단편과 10편의 시() Three Stories and Ten Poems》를 처녀출판하였고, 1924년 주로 청소년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 In Our Time》를 발표하였으며, 다음 작품 《봄의 분류() The Torrents of Spring》(1926)에 이어 발표된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1926)에 이르러 그의 명성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파리와 에스파냐를 무대로 찰나적·향락적인 남녀들을 중심으로 전후()의 풍속을 묘사하여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의 대표작가로 지목되었다. 1928년 귀국, 같은 해 아버지의 권총자살 등 어려운 사건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이듬해 전쟁의 허무함과 고전적인 비련을 테마로 한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를 완성, 전쟁문학의 걸작으로서 국외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에스파냐의 투우를 다룬 《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1932), 아프리카에서의 맹수사냥에다 문학론과 인생론을 교차시킨 에세이집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Green Hills of Africa》(1935)을 발표하였는데, 이들 두 작품에서는 그의 문학관·인생관을 직접 알 수 있다. 밀수입()에 종사하는 어선의 선장을 주인공으로 한 다음 장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To Have and Have Not》(1937)는 당시 유행된 사회소설을 지향한 것이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사회소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1936년 에스파냐내란 발발과 함께 그는 공화정부군에 가담하여 활약, 그 체험에서 스파이 활동을 다룬 희곡 《제5열() The Fifth Column》(1938)이 탄생되었고, 다시 1940년에는 에스파냐내란을 배경으로 미국 청년 로버트 조단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최대의 장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를 발표, 《무기여 잘 있거라》 이상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강을 건너 숲 속으로 Across the River and into the Trees》(1950)는 예전의 소설의 재판()이라 해서 좋지 못한 평을 얻었지만, 다음 작품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1952)는 대어()를 낚으려고 분투하는 늙은 어부의 불굴의 정신과 고상한 모습을 간결하고 힘찬 문체로 묘사한 단편인데, 이 작품으로 1953년 퓰리처상을 받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단편집으로는 《우리들의 시대에》 외에 《남자들만의 세계 Men Without Women》(1927) 《승자()는 허무하다 Winner Take Nothing》(1932)가 있다. 후에 다른 작품들을 첨가하여 한 권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는 하드보일드(hardboiled)풍의 걸작 《살인청부업자 The Killers》(1927), 표현기술의 정수를 구사한 《킬리만자로의 눈 The Snow of Kilimanjaro》(1936) 등 미국문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명단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를 오히려 단편작가로서 높이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많이 있다. 1953년 아프리카 여행을 하던 헤밍웨이는 두 번이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고, 이후 전지요양에 힘썼다. 그 후 1961년 7월 갑자기 엽총사고로 죽었는데, 자살로 추측된다. 사후에 《이동축제일()》(1964) 《만류()의 섬들》(1970) 등의 유고(稿)가 출판되었다. 그는 지성과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가혹한 현실에 감연히 맞섰다가 패배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힘차게 묘사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헬렌 켈러[Keller, Helen Adams , 1880.6.27~1968.6.1]

  미국의 맹농아() 저술가, 사회사업가. 앨라배마주()의 터스컴비아 출생. ‘삼중고()의 성녀’라고 불린다. 19개월 되던 때 열병을 앓은 후,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었다. 7세 때부터 가정교사 A.M.설리번에게 교육을 받고, 1900년에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세계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 당시 마크 트웨인은 그녀에게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는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노력과 정신력은 전세계 장애자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다양한 활동으로 ‘빛의 천사’로도 불렸다. 1906년 매사추세츠주 맹인구제과 위원에 임명되었고, 1924년부터는 미국맹인협회에도 관계하였다. 한편, 미국 전역 및 해외로 돌아다니며 신의 사랑 ·섭리와 노력을 역설하여 맹농아자의 교육, 사회복지시설의 개선을 위한 기금을 모아 맹농아자복지사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7년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저서에 《나의 생애 The Story of My Life》(1902) 《암흑 속에서 벗어나 Out of the Dark》(1913) 《나의 종교 My Religion》(1927) 《신앙의 권유 Let Us Have Faith》(1940) 등이 있다.

 

현장[ , 602?~664]

  중국 당()나라의 고승(). 이름 위(). 진혜()의 아들. 허난성[] 뤄양[] 동쪽에 있는 거우스현 출생. 10세에 뤄양 정토사()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 ·청두[]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떠났다. 도중 고창국() 왕 국문태()의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는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야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태종()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西)》 (12권)를 저술하였다.

 

호메로스[Homeros , BC 800?~BC 750]

  고대 그리스의 시인. 유럽문학 최고 최대()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자라고 전해진다. 그의 출생지나 활동에 대해서는 그 연대가 일치하지 않으나, 작품에 구사된 언어나 작품 중의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앞의 두 작품의 성립연대는 BC 800∼BC 750년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성장지로 추측되는 도시가 7군데나 되나 그 중 소아시아의 스미르나(현재 이즈미르)와 키오스섬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이 지방을 중심으로 서사시인으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오스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앞의 2대 서사시 외에 《호메로스 찬가》라는 일군()의 찬가집()이나 익살스러운 풍자시 《마르기테스》와 《와서회전()》 등 몇 가지 서사시가 그의 작품이라고 하나 이것도 불명확하다. 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동일인의 작품이냐의 문제로 오래 전부터 논쟁이 많았다. 18세기 후반 F.A.월프가 《호메로스 서설()》(1795)을 발표한 이래, 그의 존재 그 자체와 작품의 성립과정, 2대 서사시의 작자의 진부() 등 여러 가지 시비가 있었으나 어떻든 두 서사시는 한 작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일리아스》는 1만 5693행(), 《오디세이아》는 1만 2110행의 장편 서사시이며, 각각 24권으로 되어 있다. 두 서사시는 고대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그 후의 문학 ·교육 ·사고()에 큰 영향을 끼쳤고, 로마제국과 그 후 서사시의 규범이 되었다.

 

호 치민[(호지명) , Ho Chi Minh , 1890.5.19~1969.9.3]

  베트남의 혁명가·정치가, 구()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재임 1946∼1969). 본명은 Nguyen Tat Thanh.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에서 농민출신 문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프랑스선()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구엔아이 퀙[]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고,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아》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어, 조국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듬해 홍콩의 영국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석방 후 일단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1년 베트남에 잠입,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 독립 총봉기()를 목표로 세력을 키웠다.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투옥당한 무렵부터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지도하여, 구엔[]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8월혁명),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 지휘, 1954년 디엔비엔푸의 승리로써 독립을 지켰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주석(대통령)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홍무제[ , 1328.10.21~1398.6.24]

  중국 명()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1368∼1398). 묘호()는 태조(). 초명() 흥종(). 재위연호()에 의해 홍무제()라고도 한다. 호주(: )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 지내다가 홍건적()의 부장 곽자흥()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원()나라 강남()의 거점인 난징[]을 점령하였다. 그뒤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한민족()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을 폐지하여 육부()를 독립시키고 도찰원()·오군도독부()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使:)·도지휘사사(使:)·안찰사사(使:)를 병립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를 설치하고 부역황책()과 어린도책()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그러나 그가 꾀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기 때문에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병사하였다.

 

히틀러[Hitler, Adolf , 1889.4.20~1945.4.30]

  독일의 정치가, 나치스의 지도자. 오스트리아의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에 아버지를, 18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빈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실패하였고, 독신자합숙소의 공영시설()에서 숙박하면서 유산과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내의 격렬한 민족투쟁의 와중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자가 되어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하였다. 1913년 병역을 기피하여 뮌헨으로 피신했지만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뮌헨에서 공산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직후에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반()혁명사상으로 정신을 무장하였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스)이라는 반()유대주의적인 작은 정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웅변에 능하였고,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당세를 확장하였으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어 당내()의 독재자가 된 그는 군부 ·보수파()와 손잡고 민족공동체의 건설, 강대한 독일의 재건, 사회정책의 대대적인 확장, 베르사유조약의 타파,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유대인의 배척 등을 역설하였고, 특히 대중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923년 11월 8∼9일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기)를 획책했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출옥 후 와해된 당의 조직을 재편하고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것을 꾀하였다. 옥중에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출판하여,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내의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 ·정리하고,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 %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일생이 바로 나치스의 역사가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독재지배를 요구하였는데,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P.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자본가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 :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그 동안에 질녀() 안겔라 라우발(1908∼1931)을 사랑하였고 그녀가 1931년 자살한 후로는 에바 브라운(1912∼1945)을 사랑하여, 그의 자살 전날에 결혼하였다. 또 그는 채식주의자이며 담배와 술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면서 현대문학이나 현대회화를 억압하였고, 19세기적 예술을 애호하여, 특히 각종의 장려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기 주위에는 의사 ·사진사 ·운전기사 ·비서, 기타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모아 두었으며, 개인생활에서는 정치관계자와 교제하지 않았다. 매사에 우왕좌왕하는 타입이었고, 그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갈 때에는 남의 의견도 잘 들었으나, 일단 결정된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는 옹고집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인종론자이었는데, 모든 인종은 우열()이 분명하여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성격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종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인종의 성격은 유전적으로 확정되어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우수한 인종도 생존권을 확장하지 않거나 열등한 인종과 혼혈이 되면 몰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러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한 다음에는 미국을 타도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하였다.

 

히포크라테스[BC 460 ?~BC 377 ?]

  리스의 의학자. 코스섬 출신이다. 아버지에게서 의학의 실제에 대하여 배웠다. 그 후에 소아시아·그리스 각지를 편력하여 견문을 넓혔고, 많은 철학자·의학자와 의견을 교환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환자를 진료하는 한편 책을 써서 발표하였다. 또 제2·3의 여행을 계획하고 관찰력을 길렀으며, 사고력을 깊게 하였다. 그의 학설을 모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은 히포크라테스의 언설()만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소견도 곁들여 있지만, 그 속에서 히포크라테스 자신의 견해를 찾아내기는 비교적 쉽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에 근거한 것으로, 인체는 불·물·공기·흙이라는 4원소로 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은 그에 상응하는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의 네 가지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네 가지 액()의 조화(調)가 보전되어 있을 때를 그는 ‘에우크라지에(eukrasie)’라고 불렀고, 반대로 그 조화가 깨졌을 경우를 ‘디스크라지에(dyskrasie)’라 하여, 이때에 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는 임상()에서 관찰을 자세히 하고, 병이 났을 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즉 증세, 그중에서도 발열()을 반응현상()이라 생각하여 그것은 병이 치유로 향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병적 상태에서 회복해가는 것을 ‘피지스(physis)’라고 불렀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설을 세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피지스를 돕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증후학()·예후학()에 대한 연구도 깊었던 그가 특히 빈사환자()의 얼굴표정에 대하여 한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의사의 윤리에 대하여도 중요한 설을 말하였고, ‘의사의 아버지’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