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Stalin, Iosif Vissarionovich , 1879.12.21~1953.3.5]

  러시아의 정치가. 레닌의 후계자로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냈다. 본명은 그루지야어로 Ioseb Dzhugashvili. 그루지야의 고리(Gori)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Mesame Dazi)’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카프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이후 10년간에 체포 7회, 유형 6회, 도망 5회의 고초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으로 인정을 받아 1912년 당중앙위원이 되었고, 《러시아 뷰로》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스탈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13년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그곳에서 2월혁명(1917)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4월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어 제()민족 공화국의 공수동맹()인 ‘소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1919∼1922년 국가통제위원, 이어서 초대 당 서기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 동안 독재적으로 전() 소련을 통치하였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난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 서기장직에서 경질할 것을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KGB(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 이상의 자기 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유임을 인정받았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스탈린헌법’이 제정되었다. 스탈린헌법은 소련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었으나, 이 무렵 국제적 파시즘의 대두로 ‘대소전쟁()’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하여 잇따른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G.E.지노비예프 등 반대파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 ·군인 ·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 ·투옥 ·제명되었다. 1939년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문제를 제기하여 소위 ‘일국()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의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어 파시즘의 총구를 일시 서유럽 쪽으로 돌려놓았다. 1941년 V.M.몰로토프 대신에 인민위원회 의장(수상)을 겸하여 비로소 정치정면에 나섰는데, 그로부터 l개월 후에 독일의 기습을 받아 독 ·소전쟁(1941∼1945)에 돌입하였다. 그는 국방회의 의장, 적군() 최고사령관이 되어 개전 초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임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 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또 테헤란 ·얄타 ·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 연합국(미국 ·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혀, 독일을 굴복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되어 그 명성은 레닌을 능가하였고 동구()제국에 대해 헤게모니를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냉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반대자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1953년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그가 죽은 뒤, 1956년 제20차 당대회에서 N.S.흐루시초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중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을 유발하였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심각한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특히 1991년의 소련정변 이후 스탈린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는 종전의 신()적 숭배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시황제[ , BC 259~BC 210]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설한 전제 군주(재위 BC 246~BC 210). 성은 "영". 이름은 정(). 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와 이사()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 ·위() ·초() ·연() ·조() ·제()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 남부 민현[]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과 리산산[] 기슭의 수릉()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 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쑨 원[(손문) , 1866.11.12~1925.3.12]

  중국 혁명의 선도자·정치가. 자는 일선()이고, 호는 중산()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 샹산[:현재의 ]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의 형 쑨메이[]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와 홍콩[]의 서의서원(西: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외과에 능하였는데, 병원은 날로 번성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의 수령인 정스량[]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에 참가하였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한 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 의학교 때의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 주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북벌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징[]에서 객사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 교외의 중산릉[]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용공()·농공부조()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 BC 287?~BC 21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수학자 ·물리학자.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 출생. 천문학자 피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부터 기술에 재능이 있어, 그가 만든 수력천상의()는 극히 정밀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집트에 유학 중 나선()을 응용해 만든 양수기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펌프’로 불리며, 지금도 관개용 등에 쓰이고 있다. 당시 문화의 중심이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연구소 무세이온에서 수학자 코논(Conon:BC 260년경 활약)에게 기하학을 배우고 시라쿠사로 돌아와 많은 수학서()를 썼다. 아르키메데스에 얽힌 일화 가운데는 그가 지렛대의 원리 응용에 뛰어난 기술자였다는 사실과 관계되는 것이 많다. 지렛대의 반비례 법칙을 발견한 그는 시라쿠사왕 히에론 앞에서 “긴 지렛대와 지렛목[]만 있으면 지구라도 움직여 보이겠다”고 장담하였다. 왕이 해변 모래톱에 올려놓은 군함에 무장병을 가득 태우고 이것을 물에 띄우라 하였더니,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를 응용한 도르래를 써서 이를 쉽게 해냈다. 또 하루는 왕이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다. 생각에 골몰한 아르키메데스가 우연히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물 속에서는 자기의 몸의 부피에 해당하는 만큼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는 것을 문득 알아냈다. 흥분한 그는 옷도 입지 않은 채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알아냈다, 알아냈다”라고 외치며, 집으로 달려가 그 금관과 같은 분량의 순금덩이를 물 속에서 달아 본즉 저울대는 순금덩이 쪽으로 기울어 금관이 위조품인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 이 원리을 응용하여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즉 위조왕관에는 은이 섞여 있어 같은 무게의 순금보다도 부피가 크고 따라서 그만큼 부력()도 커진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싼 3차에 걸친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중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BC 201) 때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의 편을 들어 로마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이 때, 아르키메데스는 이미 70세를 넘은 고령이었지만, 이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각종 투석기 ·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무기를 고안하여 로마의 대군을 크게 괴롭혔다. 수년 후 시라쿠사가 함락되던 날,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기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날 아르키메데스는 뜰의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중, 다가오는 사람 그림자가 로마 병사인 줄도 모르고 “물러서거라, 내 도형()이 망가진다”고 외쳤다. 그러나 로마병사는 그를 몰라보고 그의 목을 쳤다. 또 만년에 죽은 뒤 건립하도록 유언된 그의 묘에는 뜻밖에도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도형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고심 끝에 발견한 정리()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그 구 부피의 1.5배이다”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는 유클리드 등 다른 기하학자들과는 달리 기하학의 문제를 푸는 데도 역시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하였다. 즉 동질()의 구와 원기둥을 만들고 이것을 저울에 달아 후자는 전자의 1.5배의 무게가 있음을 미리 알아 두고, 그 다음 이것을 귀류법()을 써 기하학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을 썼다. 같은 방법에 의한 다른 정리의 발견, 예컨대 포물선에 둘러싸인 넓이는 그와 동일한 밑변과 동일한 높이의 내접삼각형의 4/3배라는 것 등에도 사용되었다. 그는 기하학을 기술과 연결지은 학자로서 더 나아가 원주율이라든가, 우주의 크기를 나타내는 기수법() 등, 수학을 널리 실제문제 해결에 연결지음으로써 한층 더 그리스수학을 진전시킨 학자였다. 저작으로는 《평면의 균형에 대하여》 《포물선의 구적()》 《구()와 원기둥에 대하여》 《소용돌이선[]에 대하여》 《코노이드(conoid)와 스페로이드(spheroid)》 《부체()에 대하여》 《원()의 측정에 대하여》 《모래 계산자()》 《가축문제() 기타》 등이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 BC 384~BC 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삼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삼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이론()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 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을 들었다. ① 질료인(: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 에네르게이아[]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아문센[Amundsen, Roald , 1872.7.16~1928.6.18]

  노르웨이의 극지탐험가. 선원의 아들로 보르게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북극탐험을 꿈꾸었다. 크리스차니아(지금의 오슬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1895년 1등항해사가 되고, 1897∼1899년 벨기에의 남극탐험대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탐험가 F.난센의 조언을 얻어 북자극() 및 북서항로의 탐험을 기획, 1901년 그린란드 해양을 조사하였다. 1803∼1806년 소형선 이외아호()를 타고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행에 사상 처음으로 성공하였으며, 이 항해에서 북자극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1909년 미국인 R.E.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하자 목표를 남극으로 바꾸어 1910년 프람호()로 남극탐험을 떠났다. 로스해()의 고래만() 대빙벽에 기지를 설치하고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한 지 55일 만인 1911년 12월 14일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였으며, 영국의 스콧 일행보다 35일 앞섰다. 1918∼1920년 모드호()를 타고 북동항로 항행에 성공하였고, 1925년 미국의 L.엘즈워스와 함께 비행정()에 의한 북극비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6년 다시 엘즈워스, 이탈리아의 U.노빌레와 함께 비행선() 노르게호()로 스피츠베르겐으로부터 알래스카의 테러까지의 북극점 상공 통과 횡단비행에 성공하였다. 1928년 노빌레 일행의 북극탐험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비행정으로 포롬세 기지를 출발하였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조난사하였다. 그의 남극탐험에 쓰인 이외아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공원()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저서에 《남극점》(1912) 《북극해 최초 횡단》(1927, 엘즈워스와 공저) 등이 있다.

 

아소카 왕[?~?]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재위 BC 272 ?∼BC 232 ?). 한역불전()에는 아육왕()·아수가()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조부 찬드라굽타 시절에 이룩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미치는 광대한 영토를 이어받아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정치 이념을 내걸고 그 이념 실현에 정열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영역 내의 석주()나 암석에 새겨진 그의 조칙()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 가운데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그리스어나 아마르어로 새겨진 것도 있다. 이 조칙의 내용에는 그가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 오리사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그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부모·어른에의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또 도로·관개() 등의 공공사업을 전개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당시 인도에는 그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없었고, 북서 국경의 그리스 세력도 그들 내분 때문에 다른 지방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서 제반 생활양식이 다른 광대한 영토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취한 정책이 매우 현명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면에는 원시불교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그의 정치이념은 인근 제국이나 제민족에게까지 전파되어 그의 사절(使)이 이집트·마케도니아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왕의 정책은 36년 통치 후에는 점차 쇠퇴하였으나, 그의 치세()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불교도들은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하였고, 많은 설화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 , 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사상가·성인().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 《신국론()》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이라고 하였다.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 1879.3.14~1955.4.18]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1879년 3월 14일 독일 울름에서 출생하였다.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광양자설, 브라운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 이를 1905년 발표하였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으며, 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몇 가지 뜻밖의 이론, 특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브라운운동에 관한 기체론적 연구는 분자물리학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플랑크의 복사법칙을 검토하여 광양자설에 도달, 그 예로서 광전효과를 설명하였다. 1913년 베를린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나, 그 동안 자신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중력()이론이 포함된 이론으로 확대하고자,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일식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광전효과 연구와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할 것을 시도하였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유대민족주의·시오니즘운동의 지지자, 평화주의자로서 활약하였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1933년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 통일장이론 개척에 힘을 기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에 몰두하자, 미국의 과학자와 망명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가질 필요성을 통감하여 당시 대통령 F.D.루스벨트에게 그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미국에서의 원자폭탄 연구, 맨해튼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통일장이론을 더욱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리만기하학을 이용한 것으로서, 그것은 2차 대칭하는 텐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만년에 생각해낸 통일장이론은 2차 대칭이 아닌 텐서에 의거한 이론이다. 이것을 아인슈타인 최후의 통일장이론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아인슈타인상()을 마련하고 해마다 2명의 과학자에게 시상하고 있다.

 

안토니우스[Antonius, Marcus , BC 82 ?~BC 30. 8]

  고대 로마의 정치가. BC 57년부터 A.가비니우스의 부하로 동방원정()에 종군하여 무훈을 세우고, J.카이사르의 갈리아원정 때는 그의 부장()으로 신뢰를 받았다. BC 49년 호민관()이 된 뒤부터 로마에서 활약하였고, 카이사르 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는 은의()를 입은 카이사르의 한 팔이 되어 그를 도왔다. BC 44년 콘술(집정관)이 되고, 그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유언장을 발표하였다. 추도연설에서 민심을 선동하고 암살자들과 타협하면서 그들이 실권을 장악할 길을 봉쇄하는 한편, 동시에 카이사르의 세력기반(로마의 대중 ·병사)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출현으로 그의 지반이 잠식되고, 이에 편승한 공화파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합법적으로 허용된 북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일마저 실패, 결국 남프랑스 지방으로 피신해 카이사르의 유장() M.A.레피두스와 합류하였다. BC 43년 말에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국가건설 3인위원’으로서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BC 42년 필리피전투에서 M.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이기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이름을 떨쳤다. BC 40년 삼두정치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BC 37년 그 임기를 연장하여 동방원정에 전념하였다. BC 30년대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포함하는 5인의 왕의 대()패트런(Patron)이 되었고, 로마 지배하의 여러 주()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아 디오니소스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실각한 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둘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를 아내로 맞았으나, 이집트를 중시하여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아내로 삼아 그녀와 그의 아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나누어 주는 등, 그녀와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등 고국의 신임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결전을 벌였다.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쳤는데, 다음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삼두정치에서는 항상 우위를 유지하였고 동방원정도 로마의 국가적 요구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이집트에서의 그의 방종이 지나쳤고 대웅변가 M.T.키케로를 적으로 만들어, 패배자로 끝을 맺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 BC 356~BC 323. 6]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립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또는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 ·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부왕이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니,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때마침 마케도니아의 북방에 만족()이 침입하고 서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친정()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그리스가 동요하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테베를 토벌하고 테베시()의 전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BC 334년에 그는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먼저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으며, 사르디스 그 밖의 땅을 점령한 뒤 북()시리아를 공략하였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 ·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를 건설하고 1,000 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여기서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이후로 그는 만인동포관()을 지니게 되었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하여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 중의 지원자만을 거느리고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의 인더스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려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양제[ , 569~618]

  중국 수()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 이름 양광(). 연호 대업(). 문제()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문헌독고황후(). 시호 양제의 양()은 악랄한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 처음 진왕()이 되어 남조() 진()을 토벌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간악한 계략에 능하여, 형인 황태자 용()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었다(600). 권신인 양소()와 결탁하여 제위에 올랐는데, 그때 아버지 문제()를 살해하고 그 비()를 범하였다고도 한다. 즉위한 뒤에는 만리장성을 수축하였고, 뤄양[]에 동경()을 조영하였으며,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완성하는 등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자주 벌임으로써 백성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다. 그 자신은 이 대운하에 용주()를 띄우고 화려한 순행()을 하였지만,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의 물자를 북으로 운반하게 하는 등 남북 융합에 크게 공헌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에서 강성하던 돌궐()과 서방의 토욕혼()을 공략하였으나, 전후 3회에 걸친 고구려 침입에서는 번번히 대패하고 말았다. 특히 612년 제1차 고구려 침공 때는 113만의 대군을 끌고 침입하였다가 장군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대패하였다. 613년 제2차 침공 때는 후방에서 양현감()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였다. 2개월에 걸쳐 겨우 진압하였지만,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른바 수나라 말의 반란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양제가 백성을 과중하게 혹사한 데다 기근 ·수해까지 겹친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으며, 대업례() ·대업률령()의 정비와 대운하의 완성과 같은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만년은 전란을 외면하고 풍치가 아름다운 장두[: ]로 옮겨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신하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되었다.

 

에디슨[Edison, Thomas Alva , 1847.2.11~1931.10.18]

  미국의 발명가. 오하이오주() 밀란 출생. 특허수가 1,000종을 넘어 ‘발명왕’이라 불리고 있다.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새뮤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에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이사를 가 그 곳 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겨우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해 교육은 주로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12세 때에 철도의 신문팔이·과자팔이를 하면서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화물차 안으로 실험실을 옮겨 실험에 열중하였다. 신문팔이를 하던 어느 해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것이 귀에 청각장애를 일으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15세 때 역장집 아이의 생명을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을 배우게 되어 1869년까지 미국·캐나다의 여러 곳에서 전신수로서 일하였다. 그 무렵 보스턴에서 패러데이의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의 설명이 복잡한 수식()을 쓰고 있지 않은 데에 많은 흥미를 느꼈으며, 그 책에 나오는 실험을 연구하다가 1868년에 전기 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이어서 다음해에는 주식상장표시기() 등을 발명하였고 그 발명으로 얻은 자금을 기반으로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1876년에 멘로파크로, 1887년에는 웨스트오렌지로 연구소를 옮겼다. 이들 실험소에서 1871년에 인자전신기(), 1872년에 이중전신기, 1876년에 탄소전화기, 1877년에 축음기, 1879년에 백열전등, 1891년에 영화 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 1900~1910년에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한때 사업을 중단하고 해군 고문회의의 회장직을 맡아 군사과학상의 문제에 몰두하다가, 종전 후 다시 웨스트오렌지에 있는 연구소와 공장으로 돌아와 고무 대용식물의 탐구 등에 주력,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볼 때 멘로파크에서 보낸 1876~1881년까지의 기간이 가장 창조력이 왕성하였던 시기이었다. 발명기업은 번영하였고, 그가 말한 월가의 재벌들이 그의 특허를 손에 넣고자 서로들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전신·전화·백열등의 개량 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조직적인 발명이 동시에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전등의 발명이었다. 이미 필라멘트의 재료로는 백금선이 좋은가 탄소선이 좋은가 하는 비교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1870년대에는 적당한 탄소선을 사용하는 것이 비교적 유망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878년부터 백열전구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수은 배기 펌프의 개량과, 탄소 필라멘트의 채용으로 다음해인 1879년 10월 21일, 드디어 40시간 이상이나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필라멘트의 재료로는 대나무가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대나무 산지까지 사람을 보내어 재료를 모아들였다. 일본 교토[] 부근에서 나는 대가 가장 좋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은 이 대를 사용하였다. 그는 다시 전구를 보급하기 위하여 소켓·스위치·안전퓨즈·적산전력계()·배전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전반()의 설계 등, 전등의 부대설비에서 배전·충전·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기체계()를 창조해 냈다. 1882년에는 세계 최초의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등회사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1883년에 그가 전구실험 중에 발견한 ‘에디슨 효과’는 20세기에 들어와 열전자 현상으로서 연구되고, 진공관에 응용되어 그 후의 전자공업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회사는 전구의 특허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그 결과 그는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전등을 발명하였으나 전혀 이익을 보지 못했다”라고 한 말에는 월가, 즉 독점자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그의 비통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대학의 강의를 경멸하였다. 보통 교육에 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추어 가고 있다.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천재란 99 %가 땀이며, 나머지 1 %가 영감이다”라는 말은, 일생을 통한 그의 유명한 모토였다. 이것은 만년의 술회(),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하여 언제나 발명을 한다”는 말과 더불어 끊임없이 연구와 창조를 계속한 끈질긴 그의 발명가 정신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밀란의 생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겨진 멘로파크의 연구소와 웨스트오렌지의 연구소는 각각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 1469.10.27~1536.7.12]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로테르담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9세경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20세경에 정식으로 수도사()로서의 서원()을 하였다. 1493년부터 캄브레의 주교 베르고프 존(Berg-op-Zoon)의 비서가 되고, 그의 원조를 받아 1495년부터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나, 이 시절부터 경화()된 가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 비판적인 경향을 띠었다. 주로 고전 라틴문예연구에 몰두하고, 생활을 위하여 영국 귀족의 아들에게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하며, 1499년에는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T.모어, J.콜렛 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다. 특히 콜렛의 <바오로 서한>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이듬해 파리로 돌아오자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성과는 《그리스도교 전사필휴()》에 제시되었다. 1506년에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를 역방()하였으며, 1509년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였고, 런던의 모어의 집에서 단숨에 써낸 것이 유명한 희문() 《우신예찬() Encomium Moriae(Laus Stultitae)》(1511)이다. 이 내용은 ‘어리석음의 여신()’이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형식을 취하여,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서술되었다. 1461년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평화가 체결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을 간행하였다. 또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의 인쇄 교정본()을 간행하고, 《히에로니무스 저작집》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인문주의자의 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은 고국에 돌아가서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 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다. 휴머니즘()이란 ‘보다 인간적인 학예’를 초래하려는 운동인데,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의 복위·복원’을 원하여 가톨릭 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의 교정을 하고, 고대학예를 소개함으로써 경화된 사고방식 ·견해를 시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휴머니즘의 정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17년부터 M.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격화하는데,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이것에 반역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루터의 지나치게 정열적인 실천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며 여러 차례 루터로부터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를 거부하였다. 중년 이후부터 만년의 에라스무스는 그에게서 비판을 받은 가톨릭 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가 추파를 던지면서도 좀처럼 한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신교도 중의 광신도들 사이에 끼어 곤경에 처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은 전유럽에 미쳤는데, 세계주의적 정신의 소유자로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특히 프랑스의 16세기의 문화사상사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다. 저서에는 주로 라틴어로 쓴 신학적인 것이 많으나 문학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유럽의 사려깊은 사람들의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격언집() Adagia》(1500) 《우신예찬》(1511) 《대화집() Colloquia》(1518) 등을 들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 1533.9.3~1603.3.23]

  잉글랜드의 여왕(재위 1558∼1603). 그리니치 출생.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이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어스컴에게 그리스·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음악·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하였으며, 에스파냐 왕 펠리페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며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종교정책에서 전 여왕 메리 1세의 가톨릭적 반동에 의해서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여왕은 수장령()과 통일령(1558)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전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간의 치세 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 횟수는 불과 10회였다. 추밀원()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 외에도 종교범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W.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베이컨, T.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으며, 지방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치안판사로 임명하여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폐의 개주()를 단행하고,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다. 또 도제조례(, 1563)에 의하여 노동시간·임금 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1601)에 의하여 인클로저 운동과 수도원 해산으로 인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다. 유리·제당·제분·금속·광산 등 각종 공업 분야에 독점권을 부여, 이의 보호육성을 도모하는 등 중상주의()정책을 채용하였다. 특히 역점을 둔 공업, 이를테면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게 하였으며, ‘모험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하였다. 또한 회사조직에 의한 많은 무역 단체에게 특허장을 교부하여 조직함으로써 무역의 확대와 해외 진출을 도모하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설립(1600)과, 월터 러리에 의한 북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페 2세의 구혼을 거절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독립을 도왔으며,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F.드레이크와 J.호킨스에게 명령하여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 선박의 해상 지배를 위협하였다. 펠리페는 그녀를 폐위시키고 가톨릭파의 메리 스튜어트를 옹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당해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에스파냐의 해상지배는 무적함대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명랑한 잉글랜드’가 이루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스펜서·베이컨 등의 학자·문인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여왕은 ‘선녀여왕’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90년 이후부터는 퇴색되어 ‘반독점 논쟁’에서는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처녀여왕으로서 노쇠하여 죽었고,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엥겔스[Engels, Friedrich , 1820.11.28~1895.8.5]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로이센 라인주() 바르멘 출생. 부유한 공장주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업에 전렴하기 위하여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바르멘과 브레멘에서 가업에 대한 수련을 쌓으면서, 틈틈이 평론 ·시 등을 써 F.오스발트라는 필명으로 신문 등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자유’라는 청년 헤겔주의자 모임에 가입할 수 있었고, 이 모임에서 철학 ·종교 논쟁에 대한 무서운 선전가로 인정받았다. 1841년 베를린의 근위포병연대에 복무하면서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1842년 제대 후 아버지가 관계하던 공장에 입사하기 위하여 맨체스터로 가던 도중 쾰른의 《라인 신문》 편집소에서 처음으로 K.마르크스와 만나게 되었다. 영국에 체재하는 동안 사업에 종사하면서 자본주의 분석연구에 관심을 가지면서, 1844년 마르크스와 A.루게가 발간하는 《독일-프랑스 연보》에 〈국민경제학비판대강()〉을 기고하였다. 같이 논문에서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초기 해석과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모순점을 제시하여 마르크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같은해 파리에서 마르크스와 재회,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1845년 가출하여 마르크스가 사는 브뤼셀로 가서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하여 인간사회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인식방법인 유물사관()을 제시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함과 동시에, 공산주의의 연대와 결집을 목표로 공산주의 통신위원회를 창설하였다.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창설, 제2차 공산주의자대회의 위촉을 받고 1848년 2월 마르크스와 공동으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직후인 2월 프랑스에서 2월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와 함께 파리로 갔다가 다시 쾰른으로 옮겨 독일혁명을 지도하고 같은 해 6월 《신()라인 신문》을 발행하였다. 1849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런던으로 망명하였다가, 맨체스터에서 다시 사업에 종사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적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1869년 사업을 청산하고 다음해 런던으로 이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무위원이 되어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 진력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고 정리에 몰두하여 《자본론》의 제2 ·3권을 편집하는 한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락제[ , 1360.5.2~1424.8.5]

  명나라 제3대 황제(재위 1402∼1424).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 묘호 태종(). 후에 성조()로 개칭하였으며, 연호에 따라 영락제라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연왕()으로 베이징[]에 봉해졌으나, 홍무제가 죽은 뒤 적손()인 건문제()가 즉위하여 삭봉책()을 취하자 1399년에 거병()하였다. 3년의 격전 끝에 수도 난징[]을 쳐서 건문제를 패사시키고, 제위에 올랐다(의 변). 이어 산둥성[]의 지닝[]과 린칭[] 간의 후이퉁허[]를 개준()하여, 대운하의 양도()를 열었다. 1421년 북평으로 서울을 옮겨 베이징이라 고쳐, 수도의 터전을 닦았다. 영락제의 치정에서 가장 현저한 것은 주변지역에의 대규모 정벌과, 그것에 의한 명나라 국경의 확보이다. 즉, 동북지방에서는 헤이룽강[] 하류에 누르간도사[]를, 창바이산[] 북쪽에 건주위()를 두었다. 그 뒤로 많은 위소()를 두어 여진부족을 통할하고, 타타르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땅을 지배하였다. 몽골은 원()나라가 멸망한 뒤 분열상태에 있었으나 영락 초년 동부에 타타르, 서북부에 오이라트가 일어나 북변에 압력을 가하였다. 영락제는 1410년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 원정하였고 이후 1424년 진중에서 병사할 때까지 5차례의 친정()으로 그 위협을 막았다. 서남지역에서는 티베트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소수민족을 눌러 구이저우 포정사사[使]를 두었으며, 1406년에는 안남(: 베트남)에 원정하여 교지 포정사사(使)를 두고 직할지배하에 넣었다. 또 남해지역에 6회에 걸친 대원정군을 보내어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아시카가 요시미쓰[滿]를 일본국왕에 봉하여 왜구를 누르고, 감합무역(貿)의 길을 연 것도 그의 시대였다. 내정면에서는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일대유서() 《영락대전()》(1408) 외에, 《사서대전()》 《오경대전()》 《성리대전()》을 편찬시켜, 주자학의 국가교학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러나 그의 시기에 환관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이후 명나라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 BC 4?~AD 30]

  그리스도교의 개조(). 예수라는 이름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야훼)은 구원해 주신다’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구세주’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음은, 예수 탄생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제16장 16절에 의하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는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는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써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생애】 예수는 어머니가 되는 동정녀()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이 호구조사의 등록을 하러 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예수가 태어나던 날 밤 천사가 목자들 앞에 나타나 예수의 탄생을 고하며,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2:4). 예수 탄생 후 그 일가는 헤롯왕의 유아살해()를 피하여 이집트로 여행하고, 헤롯이 죽은 후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나사렛에서 예수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루가 2:51), 열두 살이 되던 해, 유월절() 명절을 맞아, 해마다 그랬듯이 부모를 따라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예수는, 성전에서 학자들과 성서(구약)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학자들은 예수의 지혜와 그 대답에 경탄하고 있었는데, 그를 잃어버리고 찾아 헤매던 부모를 보고 예수는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루가 2:48). 예수는 30세경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마태 4:1) 40주야의 단식기도를 하면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다. 성서에 기록된 말들을 인용,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마태 4:11, 루가 4:8) 광야에서 머무른 후 예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의 세 복음서는 예수의 선교활동에 관한 똑같은 기록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예수의 발자취를 정확히 더듬는다든지, 그가 방문한 고장을 차례대로 추적하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광야에서 나와 베다니로 돌아갔는데, 여기서 첫 번째 제자를 얻어 그들과 함께 갈릴레아(갈릴리)로 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행하였다. 공생활에서의 최초의 유월절(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거기서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몰아내었다. 예수는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어느날 밤 조용히 찾아온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일러 주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중생(:거듭 남) 또는 신생(:새로 남)의 교리이다.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유다 지방을 떠나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레아로 향하였다. 도중에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수가)라는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자기가 메시아임을 밝혔는데, 그녀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요한 4:42)고 한다. 그 뒤 갈릴레아의 가버나움으로 내려간 예수는 그곳 회당(시나고그)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신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루가 6:5)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온 갈릴레아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었다. 이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신들린 사람 ·간질병자 ·중풍병자들을 모두 그의 앞에 데려왔다. 예수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었다. 그러자 갈릴레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예수를 따랐다(마태 4:23∼25). 예수는 이 무렵 유명한 산상() 설교를 하였으며, 또한 12제자를 선발하였다. 예수는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갔는데,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 예수는 이사야 예언서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낭독하였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사람들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았는데, 예수는 예언자 엘리야가 동포인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이방()의 어떤 과부에게로 보내졌다는 사실, 예언자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는 고쳐주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그가 말하는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만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전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비쳤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으나, 예수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갔다(루가 4:25∼30).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스왕(헤롯왕)에게 살해된 사실을 안 후, 예수는 갈릴레아를 떠나 필립비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떠났는데, 그 길에 제자들에게 구세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말해주었다. 예수가 제자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예수가 그들 앞에서 변모하여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같이 눈부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 즉, 예수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시() 방법으로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예언자의 신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깨달았던 것이다(마태 17:1∼8, 마르 9:2∼8, 루가 9:28∼36). 그후 예수는 은밀히 예루살렘으로 가 설교도 하고, 병자들의 병을 고쳐 주곤 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지닌 권위에 놀란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예수는 요르단강을 건너 베레아 지방으로 가, 베다니에서 마리아의 동생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었다. 이때 예수는 마리아의 자매 마르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고 말하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죽은 라자로를 예수가 살려냈다는 이야기가 전파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를 위험시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하며 의논하였다(요한 11:47∼48).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요한 11:53). 과월절 전날 목요일 밤에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고, 그날 밤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였다. 게쎄마니에서 잡힌 예수는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선고받고, 이튿날 아침 십자가를 지고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골고타 언덕길을 올라가 거기서 강도들과 함께 신을 모독하였다는 중죄인으로서 십자가 나무틀에 못박혀 죽었다. 일요일 아침, 예수가 묻힌 무덤은 비어 있었다. 예수는 생전에 자신이 예언한 바와 같이 부활하였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은 그후 여러 곳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복음서들은 그 사실과 함께 그가 올리브산(감람산)에서 승천()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옥타비아누스[Augustus , BC 63.9.23~AD 14.8.19]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재위 BC 27∼AD 14). 황제명은 아우구스투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이다. 서민 출신이나 그의 어머니가 카이사르의 질녀로 아버지가 죽은 후 카이사르의 보호를 받았다.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 그의 유언장에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음을 알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였다. 카이사르의 유병()을 장악하여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를 시작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BC 42년에는 필립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3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부터는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BC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한 후 패권을 잡았다. 그는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빈약하였으나 아그리파를 비롯하여 여러 부장의 조력과 나아가 전 이탈리아, 그리고 전체 속주()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어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을 진정하였다. 질서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BC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으며, 공화정의 명목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인 제정()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민 가운데의 프린켑스(제1인자)로서, BC 23년 프로콘술(속주의 장관)에 대한 명령권과 호민관의 직권() 등의 공화정체의 권한을 수중에 넣고 프린키파투스, 즉 원수정()을 시작하였다(일반적으로 이때부터 로마 제정의 시초로 삼지만, 프린키파투스라고 불러야 될 것이다). 그는 속주를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구분하였고, 또 군단 수를 28로 정하여 내외의 수비를 견고히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숙적인 파르티아를 무찔렀지만, 9년에 토이토부르거전투에서 게르만 군대에게 패배하여 3개 군단을 잃고 나서 수세로 변하였다. 한편, 신분질서를 다시 수립하고, 풍기 숙정 등을 단행한 것 외에도 치안과 식량 문제에 마음을 써서 로마시()의 질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규모 건축사업도 일으켜, 벽돌의 도시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경시켰다고도 한다. 특히 내정의 충실을 기함으로써 41년간의 통치기간 중에 로마의 평화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등이 활약하는 라틴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후계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국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공동 통치자로 임명한 후 티베리우스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왕희지[ ,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 자 일소(). 우군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왕우군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 린이현[]인 낭야 출신이며,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의 조카이고, 왕광()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번째 아들 왕헌지()와 함께 ‘이왕()’ 또는 ‘희헌()’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의 서풍()을 배웠고, 뒤에 한()나라 ·위()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 )의 내사()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의 재략이 있어 은호()의 북벌을 간()하는 글과 사안()에게 민정()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 ·이충() ·허순() ·지둔() 등과 청담()을 나누고, 또 도사() 허매()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늦봄에, 회계의 난정()에서 있었던 유상곡수()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머리에 그는 스스로 붓을 들어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이 되었다. 그는 예서()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 ·행 ·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 ·행 ·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 《황정경()》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이 옛날부터 유명하다. 또 송()의 태종()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나라의 회인()이라는 중이 고종()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 《공시중첩()》 《유목첩()》 《이모첩()》 《쾌설시청첩()》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은 전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위고[Hugo, Victor-Marie , 1802.2.26~1885.5.22]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소설가·극작가.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출신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코르시카·이탈리아·에스파냐 등지로 전전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부모의 화합이 원만하지 못하여 1812년부터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파리에 정주하였고, 그는 1814년부터 기숙학교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군인이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는 문학에 흥미를 갖고 제2의 F.R.샤토브리앙을 꿈꾸었다. 181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콩쿠르에서, 이어 1819년 투르즈의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그의 시()가 입상하였다. 그 해에 형 아베르와 함께 낭만주의 운동에 공헌한 잡지 《Conservateur Littéraire》를 창간하였다. 1822년 어릴 적 친구였던 아델 푸세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 《오드, 기타 Odes et poésies diverses》를 냈는데, 이 작품으로 루이 18세와 가까워져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이 무렵의 위고는 왕당파이자 가톨릭적이었다. 이 밖에도 시는 《오드와 발라드 Odes et ballades》(1826), 《동방시집 Les Orientales》(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Han d’Islande》(1823), 희곡 《크롬웰 Cromwell》(1827) 등을 발표하였다. 처음에 노디에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낭만주의자들이, 이 무렵부터 그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 들어서 이른바 ‘세나클(클럽)’을 이루어, 사실상 낭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한 의미로 《크롬웰》의 서문은 낭만주의 문학의 선언이라 할 만큼, 그는 고전주의를 비판하여, ‘삼일치()의 법칙’ 중에서 시간과 장소의 일치는 너무나 구차한 구속이라고 주장하였다. 1830년에는 희곡 《에르나니 Hernani》의 상연을 계기로 고전주의 지지파와 격렬한 투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1833년 애처() 아델과 친구 상트 부브와의 추문으로 크게 상심하던 중 여배우 J.들루에와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1830년 7월혁명이 일어날 무렵부터 위고는 인도주의와 자유주의로 기울어, 시() 《가을의 나뭇잎 Les Feuilles d’automne》(1831), 《황혼의 노래》(1835), 《마음의 소리 Les Voix intérieures》(1837), 《빛과 그림자 Les Rayons et les ombres》(1840)와 희곡 《마리옹 드 로름 Marion de Lorme》(1831), 《왕은 즐긴다 Le Roi s’amuse》(1832), 《뤼 블라 Ruy Blas》(1838), 《뷔르그라브 Les Burgraves》(1843)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소설에는 불후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1831)가 있다. 1843년 딸 레오포르딘이 남편과 더불어 센강에서 익사하자, 비탄에 빠져 그로부터 약 10년간 문필을 중단하고 정치에 관심을 쏟았다. 1848년의 2월혁명 이후는 공화주의에 기울어, 1851년에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이 쿠데타로 제정()을 수립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 결국 망명의 길에 올라, 벨기에를 거쳐 영국해협의 저지섬과 간디섬에서의 19년간에 걸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나폴레옹 3세를 비난하는 《징벌시집() Les Châtiments》(1853), 딸의 추억과 철학사상을 노래한 《정관시집() Les Contemplations》(1856), 인류의 진보를 노래한 서사 《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1859),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 《바다의 노동자 Les Travailleurs de la mer》(1866), 《웃는 사나이 L’Homme qui rit》(1869) 등을 발표하였다. 그에게는 이 망명기간이 인생에서 가장 충실한 시기였으며, 파리에 돌아온 이후에 발표한 대부분의 작품이 이 시기에 집필된 것이라고 한다. 1885년 그가 죽자 국민적인 대시인으로 추앙되어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팡테옹에 묻혔다. 위고의 생활과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웅대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이다. 다른 낭만파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감상적인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는 부수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생애의 반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 이상주의 사회건설 등의 낙관적인 신념으로 일관되어 있다

 

유방[ , BC 247 ?~BC 195]

  중국 한()나라의 제1대 황제(재위 BC 202∼BC 195). 자 계(). 묘호() 고조(). 패(: ) 출생.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가업을 돌보지 않고 유협()의 무리와 교유하였다. 장년에 이르러 사수정장(:하급관리)이 되었으며, 당시 여산()의 황제릉() 조영 공사에 부역하는 인부의 호송책임을 맡았다. 호송 도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여 임무수행이 어려워지자, 나머지 인부를 해산시키고 자신도 도망하여 산중에 은거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이르러 진승() ·오광()이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였으며, 유방도 향리의 지도자와 청소년층의 추대를 받아 진나라 타도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군사를 일으켜 패공()이라 칭하였다(BC 209). 다음해 북상하여 항양() ·항우()의 군과 만나 연합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뒤 항우의 군대가 동쪽에서 진군()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 그는 남쪽으로 관중()을 향해 진격을 계속하여 항우보다 앞서 수도 셴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또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을 폐지하고 법삼장()을 약속하여 인심을 수습하였다. 약 1개월 늦게 셴양에 도착한 항우는 그를 살해할 목적으로 홍먼[]에서 대연회를 베풀었으나(), 장양()과 번쾌() 때문에 실패하였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항우는 서초패왕(西)이라 칭하고, BC 206년 유방은 항우로부터 한왕()에 봉해졌다. 그뒤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소하() ·조참() ·장양() ·한신() 등의 도움으로 해하()의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에 오르고 수도를 창안[]으로 정하였다. 한왕조 건설에 공이 큰 장수와 부하를 제후왕()과 열후()로 각지에 봉()하였으나, 얼마 뒤 이들이 모두 멸망하자 왕실일족() 출신으로 대체되어, 제후왕은 한실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불문율이 성립하였다. 유방은 서민 출신이었으나 성격이 대담치밀하고 포용력이 있어, 부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데 능숙하였으므로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유비[ , 161~223]

  삼국시대 촉한()의 제1대 황제(재위 221∼223). 자 현덕(). 묘호 소열제().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하지 않고 호협()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결의형제하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조조()와 서주목() 도겸()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196년 원술()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 ·조조의 관도대전()에서 원소와 동맹하고, 이에 패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가서 객장()이 되었다. 이 무렵 삼고지례로 제갈 양()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가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 침입을 기도하자,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촉()에 들어가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형주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여,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이 영유하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였다. 다음해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사를 제갈 양에게 위탁하고 병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I , 483~565.11.14]

  비잔틴 제국의 황제(재위 527∼565). 마케도니아 출신. 아나스타시우스제()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백부 유스티누스 1세(재위 518∼527)에 의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불리어 가서, 제국 통치의 숨은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백부의 죽음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역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측근들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경마장의 스트리퍼였다고 하는 왕비 테오도라의 뛰어난 조언은 황제의 정책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왕비는,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민들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교에서의 이단인 ‘단성론()’에 대하여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황제의 종교정책이 로마에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게르만 민족대이동 결과 5세기에 잃은 옛 로마 서방의 영토 재정복의 꿈을 실현시킬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환관 나르세스를 기용하여, 반달 전쟁(533∼534) 및 동고트 전쟁(535∼540, 541∼552)을 일으키고, 또한 552년에는 서고트 왕국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카르타고 ·이탈리아 및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 지중해를 다시 ‘그들의 바다’로 할 수 있었다. 그 막대한 전비를 잘 처리하기 위해 황제가 국가 재정을 맡긴 사람이 카파도키아의 요하네스였고, 국가 행정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로마법 정비의 임무를 맡긴 사람이 법조가인 토리보니아누스였다. 이리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고대 로마 법학자들의 ‘학설집’, ‘법학 입문’ 및 법전 편찬 이후에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신법’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이 완성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위대한 건축 활동가로서, 특히 이시도로스나 안티미오스 등 당대의 으뜸가는 건축가를 발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성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이런 일체의 활동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인도한 것은, 신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일을 위탁받아 최고의 권력자로서 행동한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적 은총황제로서의 이념이었다.

 

유클리드[Euclid , ?~?]

  BC 300년경에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그리스 기하학, 즉 ‘유클리드 기하학’의 대성자이다.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의 저서 《기하학원본(기하학원론 또는 단지 원론 ·원본으로 불리기도 한다) Stoikheia》(13권)은 플라톤의 수학론을 기초로 한 것으로, 그 이전의 수학(기하학)의 업적을 집성()함과 동시에 계통을 부여하여 상당히 엄밀한 이론 체계를 구성하였다. 기하학에 있어서의 경전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유클리드라 하면 기하학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 밖에 현존하는 저서로는 《보조론()》 《도형()의 분할에 대하여》가 있으며, 응용수학서로는 《구면천문학()》 《광학()과 반사광학》 《음정()의 구분과 화성학입문()》이 있다.

 

이백[ , 701~762]

  중국 성당기()의 시인. 자 태백(). 호 청련거사(). 두보()와 함께 ‘이두()’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인 촉()나라의 장밍현[]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을 따라서 장난[] ·산둥[] ·산시[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 ·남릉(:) 동로(:)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 ·원단구() ·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의 부름을 받아 창안[]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 오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調)》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 ·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이라 평한 하지장()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으로 향하여 뤄양[] ·카이펑[]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西)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西] ·허베이[]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현재의 ) ·금릉(:)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 영왕() 인()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西)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 ·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의 친척 이양빙()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하기도 하였으며, 민산()에 숨어 선술()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의 비상()’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까지도 그것을 혼돈화()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와 신선()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이다. 두보의 오언율시()에 대하여, 악부() 칠언절구()를 장기로 한다. ‘성당()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 ·시대 ·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 ·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 ·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 "소사빈"의 《분류보주 이태백시()》, 청대() 왕기()의 《이태백전집()》 등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 1841.10.14~1909.10.26]

  일본의 정치가. 본명 하야시 도시스케[].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하였다.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하급무사의 집안인 이토가[]에 양자로 들어갔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수학, 존왕양이()운동에 참가하였다. 메이지[] 신정부 성립 후 정계에 투신하여, 외국사무국 판사 등을 역임하고, 1870년에는 화폐제도·은행제도 조사를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다. 1881년 국회개설문제로 정부 내에 대립이 생기자 기성세력을 몰아내고 메이지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고, 1888년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국회의 개설과 동시에 귀족원 의장이 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5년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 병탄()의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다.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만주시찰을 겸하여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담차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였는데, 상하이[] 임시정부 대한독립단 소속의 안중근()에게 총탄을 맞고 죽었다.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며, 특히 메이지헌법의 초안작성(1889)과 양원제()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하였다

 

잔 다르크[1412.1.6~1431.5.28]

  15세기 전반에 영국의 랭커스터 왕조가 일으킨 백년전쟁 후기에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적인 소녀. 가톨릭의 성녀(). 로렌과 샹파뉴 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 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하였다.

 

장자[ , BC 369~BC 289 ?]

  중국 고대의 사상가, 제자 백가() 중 도가()의 대표자. 성은 장(). 이름은 주(). 송()의 몽읍(: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인 칠원()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나라의 위왕()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의 곽상()이 산수()한 33편( 7, 15,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 ·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이며 대전()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와 좌망()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라고 한다. 물()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이라야 누릴 스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의 무위사상()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은 그에게 남화진인()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 ·명() 이학()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제갈량[ ,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220∼263)의 정치가·전략가. 자 공명(). 시호 충무(). 낭야군 양도현( : ) 출생.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에서 숙부 제갈 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 12) 위()의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고 '군신수어지교()'를 맺었다. 이듬해, 오()의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를 유비의 영유()로 하였다. 그후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221년( 1) 한()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는 어린 후주() 유선()을 보필하여 재차 오()와 연합, 위()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윈난[]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와의 국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와 오장원(:西)에서 대진 중 병몰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전출사표()》 《후출사표()》는 천고()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졌다.

 

제너[Jenner, Edward , 1749.5.17~1823.1.26]

  영국의 의학자, 우두접종법의 발견자. 글로스터셔주 버클리 출생. 13세 때부터 의학을 공부하였으며, 1770년에 J.헌터로부터 2년간 외과학을 배우고, 세인트조지병원에 근무하였다. 1773년에 귀향하여 병원을 개업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자연계의 동물에 대하여 실험과 관찰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부터 우두()에 감염되었던 사람은 일생 동안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말에 귀를 기울여, 관찰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1796년에 한 낙농부()에게서 채취한 우두농()을 8세의 한 소년의 팔에 접종하는 데에 성공하여, 그로부터 6주 후에 천연두농()을 그 소년에게 접종하였으나, 그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1798년에 《우두의 원인과 효과에 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Causes and Effects of the Variolae Vaccinae》라는 소책자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반향은 매우 컸으며, 이 책자를 둘러싼 찬반() 양론 또한 격렬하여 영국에서는 반대론이 강하였고, 여러 외국에서는 찬성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우두접종의 유효한 사실이 점차 널리 인정되어 1803년에 런던에 우두접종 보급을 위하여 왕립제너협회가 설립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접종을 해주었다. 그 결과 천연두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격감되어 영국의회에서는 그의 공로에 대하여 상금(3만 파운드)을 주었다. 1823년에 최후의 논문 <후조의 이동에 대하여>를 왕립학회에 제출하였다.

 

주희[ , 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자 원회()·중회(). 호 회암()·회옹()·운곡산인()·창주병수·둔옹(). 이름 희(). 푸젠성[] 우계()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 진회()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에 따라 호적계()·유백수()·유병산()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사숙()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로는 장남헌()·여동래()가 있으며,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의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 《논어훈몽구의()》 《곤학공문편()》 《정씨유서()》 《논맹정의()》 《자치통감강목()》 《팔조명신언행록()》 《서명해의(西)》 《태극도설해()》 《통서해()》 《정씨외서()》 《이락연원록()》 《고금가제례()》로 이어져 《근사록()》의 편차()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인 주염계()·장횡거()·정명도()·정이천()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 강론에서 존덕성()에 대해 도학()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 《시집전()》 《주역본의()》 《역학계몽()》 《효경간오()》 《소학서()》 《대학장구()》 《중용장구()》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의 신주()'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 《맹자요로()》 《예서(:)》 《한문고이()》 《서전()》 《초사집주후어변증()》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을 개정()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에 대한 지정()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나 〈무신봉사()〉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휘국공()이 추증()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가 편찬한 《주문공문집()》(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 편찬의 《주자어류()》 140권이 있다.

 

처칠[Churchill, Winston Leonard Spencer , 1874.11.30~1965.6.24]

  영국의 정치가. 1874년 11월 30일 옥스퍼드셔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4경기병 연대에 입대, 인도로 배속되었는데 특별허가를 얻어 쿠바반란 진압작전에 참가하였다. 1898년 수단원정, 1899년 보어전쟁에 참가하여 종군기사를 신문에 발표하였다. 보어전쟁에서는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00년 보수당의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당적을 자유당으로 옮겼다. 1906년 이후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식민장관·해군장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중 다르다넬스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1915년 해군장관의 자리를 물러났다. 1917년 군수장관으로 다시 입각, 1919년 육군장관 겸 공군장관, 1921년 식민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자유당은 분열하여 쇠퇴의 길을 걸었고, 또 소련에 대한 강한 반감과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노동운동에 대한 위구심에서 보수당에 복귀하였다. 1924년 보수당 S.볼드윈 내각의 재무장관이 되어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하고, 영국의 파운드화()를 금본위제로 복귀시켰다. 1926년 총파업 때에는 강경한 탄압정책을 주장하여 노동운동가들로부터 적대시되었다. 1929년 내각 총사퇴 후 10년간은 보수당 주류파와 견해를 달리 하였던 탓으로 1931년 거국내각에도, 1935년 보수당 내각에도 입각하지 않고 각외에 머물러 있었다. 보수당 주류파와 견해의 차이점은 당시 초당파적인 국책이라 할 수 있었던 인도자치론에 반대한 것과 대독일강경론을 주장하여 주류파의 유화()정책에 반대한 것이었다. 당시 보수당 주류파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공산주의에 대한 방파제로 생각하여 유화정책을 주장한 반면, 처칠은 나치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의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하여 영국의 군비낙후를 규탄하고, 영국·프랑스·소련의 동맹을 제창하였다. 소련과도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이데올로기상의 반소주의()가 영국의 안전보장이라는 지상명령에 자리를 양보한 결과였다. 그의 주장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르러 그 정당성이 인정되기 시작하였으며, 1940년 노르웨이작전 실패를 계기로 보수당은 총리 N.체임벌린 대신에 그의 지도를 요망하게 되어 그 해 총리에 취임하였고, 전시 중에는 노동당과의 연립내각을 이끌고 F.D.루스벨트, I.V.스탈린과 더불어 전쟁의 최고정책을 지도하였다. 1945년 총선거에 패한 후에는 야당 당수로서 집권 노동당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았으며, 국제정치상으로는 동서양극화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반소() 진영의 선두에 섰으며, 1946년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의 연설에서 ‘철의장막(iron curtain)’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1951년 다시 총리에 취임하였고, 그 해 ‘경(:Sir)’의 칭호를 받았다. 1955년 당수의 자리를 R.A.이든에게 물려주고, 평의원으로 하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는 또 역사·전기 등의 산문에도 뛰어나 《랜돌프 처칠경 Lord Randolph Churchill》(1906) 《말버러:그 생애와 시대 Marlborough:His Life and Times》(4권, 1933∼1938) 《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6권, 1948∼1954) 《영어사용국민의 역사 A History of the English Speaking Peoples》(4권, 1956∼1958)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53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화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측천 무후[ , 624 ?~705.12.16]

  당나라의 제3대 고종()의 황후. 이름 조(). 산시성[西] 출생. 대재상목으로 당나라 창업에 공헌한 무확()의 딸. 일설에는 630년에 출생하였다고도 한다.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는데, 고종의 눈에 띄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후 간계를 써서 황후 왕씨()를 모함하여 쫓아내고 655년 스스로 황후가 되었다. 수년 후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스스로 정무를 맡아보며 독재권력을 휘둘렀으며, 문예와 이무()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구귀족층을 배척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예종()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그녀에게 반항하여 난을 일으킨 이경업()과 당나라의 황족 등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사()와 밀사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불경을 위조하고 부서()를 날조하여 무씨()의 천하를 합리화시켰다. 690년 국호를 주()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주나라의 전통을 따라 역법()·관명()을 새로 정하는 한편, 북문학사()들에게 명하여 《신궤()》 《백료신계()》 등을 찬()하게 하였고,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여 인재를 모았다. 또 인심을 얻기 위하여 관작()을 마구 뿌렸으며, 명당()·천당()·천추()·대불()과 같은 대건축물을 세워 국위선양에 힘썼다. 적인걸()·위원충() 등의 명신을 적절하게 등용시켰으나, 말기에는 장역지() 형제 등 총신들이 정사를 그르쳤고, 705년 장간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왕조가 부흥하였다. 얼마 후 측천무후는 병사하였는데, 그녀는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요승() 회의() 및 장역지 형제와의 추문을 남기는 등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칭기즈 칸[(성길사한) , Chingiz Khan , 1155 ?~1227.8.18]

  몽골제국의 창시자(재위 1206∼1227). 묘호() 태조(). 아명 테무친[]. 바이칼호 근처 출생.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가 ‘칭기즈, 칭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 1162년,1167년 등의 이설이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타타르 부족에게 독살되어 부족이 흩어졌기 때문에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1189년경 몽골씨족연합의 맹주()에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1201년 자다란 부족의 자무카를 격파하고, 타타르 ·케레이트를 토벌하여 동부 몽골을 평정하였으며(1203), 군제()를 개혁한 후 서방의 알타이 방면을 근거지로 하는 나이만 부족을 격멸하고(1204)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1206년 오논 강변 평원에서 집회를 열고, 몽골제국의 칸에 오르면서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 편성하였다. 천호 및 그 하부조직인 백호는 동시에 행정단위이며, 천호장 ·백호장에는 공신들을 임명하여, 이들을 좌익() ·중군() ·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 두었다. 또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 ·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 특권을 부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서하(西)를 점령하고, 금()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지금의 베이징)에 입성하였다(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로 망명하여 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병합하였다(1218). 또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패자() 호레즘국과 교역하려고 파견한 사절단이 살해되자, 이것을 계기로 서정(西)에 올랐다(1219). 오트랄 ·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고(1220) 다시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제공()의 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 결정하고, 차가타이 ·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와 장인()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 정복한 땅은 아들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을 이룩하게 하였으나, 몽골 본토는 막내아들 툴루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 시장강[西] 강변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 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로 채용하였다.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또 요()나라 유신() 야율초재()와 위구르인 진해()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 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