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 BC 372 ?~BC 289 ?]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 자는 자여(輿) 또는 자거()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 쪼우셴현[]에 있었던 추()에서 출생하였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이나 외교적 책모()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의 덕()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멘델[Mendel, Gregor Johann , 1822.7.22~1884.1.6]

  오스트리아의 유전학자 ·성직자. 실레지아 지방의 하인첸도르프(현 체코의 하이첸) 출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원예일을 도와 자연과 친숙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를 하면서 오르뮈츠의 철학연구소를 22세에 졸업, 브륀(현 체코의 브르노)의 성토마스교회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도 잡았다. 1851년 교회의 후원으로 빈대학에 유학, 1853년까지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수학 등을 청강, 1854년 브륀국립종합학교 교사가 되었다. 1856년부터 교회 뜰에서 완두로 유전의 실험을 하여 7년 후 ‘멘델법칙’을 발견하였다. 1865년 브륀의 자연과학협회 정기회의에서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라는 제목으로 이것을 발표하였으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 이 대발견은 20세기까지 햇빛을 보지 못하였다. 1868년 성토마스수도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1874년 교회과세법으로 정부와 대립, 그의 재산이 차압되는 등 불우한 가운데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멘델법칙’은 크게 각광을 받아, 1910년 브륀에는 동상이 서고 그곳을 멘델광장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는 유전 ·진화의 문제에서 획기적인 발견을 함으로써 유전학을 창시한 셈이다. 계획의 치밀성, 실험의 정확성, 자료처리의 탁월성, 논리의 명쾌성 등에서 뛰어났던 그의 실험은 생물학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꼽힌다. 주요저서에는 《식물의 잡종에 관한 실험》이 있다.

 

모세[Mose(s)]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 ·민족적 영웅. 구약성서의 맨 앞에 있는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그 내용이 모세와 관련되는 바가 많아 ‘모세 오경(:)’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레위기》 《신명기》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라 일컬어진다. 최근의 고고학적 ·금석문학적() 연구 결과 성서에 기술된 이집트 입국, 이집트 탈출, 야훼 종교의 채용, 가나안 정복 등은 그 대체적인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에 아주 가까운 것으로 인정되어, 이 역사적 사실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실재성이 매우 높아졌다.이스라엘의 일부인 라헬의 후예들은 이집트로 들어가 라메스 2세(재위 BC 1290∼BC 1223)의 박해를 받았다. 그 일족인 레위 가계의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태어난 모세는, 파라오왕()의 이스라엘인() 영아학살을 피하여 나일강에 버려졌는데, 다행히도 파라오의 딸에 의해 구출되어 왕궁에서 양육되었다. 그가 40세 때 동포가 몹시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유목민 미디안족()의 사제() 이드로(르의엘)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아 게르솜과 엘리에젤이라는 두 아들을 얻었다. 그가 80세 되던 해 호렙산()에서 미디안족의 신() 야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라는 음성을 듣고 이집트로 돌아와, 형 아론의 협조를 얻어 파라오와 싸워 이겨서 히브리 민족의 해방을 이룩하였다. 이어 시나이산()에서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의 중개자가 되었다(출애 20:1∼17, 신명 5:6∼21, 출애 34:14∼33). 그 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돔 ·모압의 광야에서 40년에 걸친 유랑생활을 계속한 끝에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민수 33). 모세는 야훼의 명에 의하여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 예리고 맞은 편 모압 땅의 느보산()에서 향년 120세에 죽었다(신명 33 ·34장).

 

모차르트[Mozart, Wolfgang Amadeus , 1756.1.27~1791.12.5]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잘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나타내어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사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번째로 빈을 다녀온 후,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닥쳐오는 경제적인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의 인자()》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몽테뉴[Montaigne, Michel Eyquem de , 1533.2.28~1592.9.13]

  프랑스의 사상가 ·모랄리스트.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퀨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퀨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몽테스키외[1689.1.18~1755.2.10]

  프랑스의 사상가. 보르도 출생. 계몽사상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보르도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파리로 나가서 많은 학자들과 사귀었다. 1714년 보르도 고등법원의 평정관()을 지내다가 뒤에 원장이 되었다(1716∼1726). 1721년 당시의 프랑스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작품 서간체()의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재치 있는 기지()와 기교에 넘친 이 작품은 그를 파리 사교계에서 유명하게 하였다. 그는 곧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어 1728년부터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고 영국에 3년간 체재하였다. 그 동안 각국의 정치 ·경제에 관해 관찰하고,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하여 《로마인의 성쇠원인론()》(1734) 등을 저술하였고, 또 10여 년이 걸린 대저() 《법의 정신》(1748)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곧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2년 동안에 22판()을 냈다. 법을 연구하자면 선험적인 이론으로서는 안 되며,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은 그는, ‘자유의 거울’인 영국 헌법의 원리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어떤 영국인은 그에게 ‘당신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우리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개인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사법 ·입법 ·행정의 3권으로 나뉘어 서로 규제 ·견제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된다고 하는 그의 3권분립의 이론은, 왕정복고(), 미국의 독립 등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옹호하게 되는 기본적 자유의 규정에 공헌하였다. 또 그 구체적 사회의 분석은, E.뒤르켐도 말하였듯이, 근대의 사회학에 방법과 연구의 영역()을 주었다. 만년에는 시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몇 개의 저작에 착수하였으나, 대부분이 그의 생전에는 간행되지 않았고 《여행 노트》 《서간()》 등은 1941년에 겨우 출판되었다.

 

무제[ , BC 156~BC 87]

  중국 전한() 제7대 황제(재위 BC 141∼BC 87). 성명 유철(). 시호 세종(). 즉위 후 전대의 권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오경박사()를 두어 유학에 중점을 두고, BC 127년부터 제후왕국을 왕의 여러 아들에게 분봉()하여 중앙집권화하였다. 후에 전국을 13주()로 나누고, 주마다 자사()를 두어 군수를 감독시켰다. 또 운하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장건()을 대월지국()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2군을 두고, BC 119년에는 위청이 흉노를 외()몽골로 내쫓았다. 하서(西)에 있던 흉노 혼야왕()도 항복했으므로, 그 곳에 4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서역 제국의 입공()이 계속되었으나, BC 104년에는 이광리()에게 명해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흉노의 방위와 서역 유지를 위해 요지로 한인을 이주시키고, 또 둔전()을 두었다. 남방에서는 지금의 푸젠성[]에 있던 민월·동월() 두 왕국을 합치고, BC 111년에는 번우()에 도읍한 남월왕국을 멸망시켜 9군을 두고, 쓰촨성[] 변경에서 윈난[] ·구이저우[] 방면에 이르는 염방·수·작·야랑()·전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동으로는 조선을 공격,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BC 108년 낙랑 ·진번 ·임둔 ·현도 4군을 두어 군현제를 실시했다. 외적에 성공한 반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를 모아, 태산()에서 봉선()하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군사비를 압박했다. 그래서 증세 ·신세()에다 소금[] ·철()을 전매하고 균수() ·평준법()을 제정하고, 무공작()을 팔기도 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황태자의 반란[]이 일어났다. 만년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다시 먼 거리에 있는 윤대(: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둔전()을 폐지,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무제 때의 특색은 중앙집권화와, 밖으로 지역이 확대되고, 특히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교섭이 왕성해진 점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 1475.3.6~1564.2.18]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使)나 역사()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에의 추이()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의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Gama, Vasco da , 1469~1524]

  포르투갈의 항해자. 어린 시절에 대하여서는 에보라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다는 것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1세의 인정을 받아, B.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후로 숙원이던 인도항로 개척의 원정대장이 되었다. 1497년 7월 4척의 선대()를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을 써서(약 6,400 km), 11월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5월 22일 캘리컷에 도착,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독점무역에 위협을 느낀 이슬람 상인들의 방해와, 무력()에 대한 지방 영주()들의 경계심 때문에 정식 통상교섭은 난항을 거듭, 3개월 만에 겨우 약간의 향료를 입수하였다. 10월 다시 인도양을 횡단하여 올 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항해하나, 괴혈병() ·열병 등으로 선원의 반 이상을 잃었다. 1499년 9월 가까스로 리스본에 귀환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귀족이 되어 연금()을 받았다. 그 뒤로 인도무역은 해마다 확대되었으나 현지인과의 마찰이 점차 격화되어, 1502년 다시 15척의 대함대()를 인솔하고 인도에 건너갔을 때에는 이슬람과 힌두 연합함대의 반격을 받았다. 이를 격파하고 코친 ·카나놀 등 각지에 상관()을 설치, 인도무역 독점의 기초를 다졌다. 그 뒤 백작에 봉해지고, 국왕의 인도정책 고문이 되었다. 1524년 국왕을 대신하여 현지 공관()의 부패숙정을 위해 인도에 갔으나,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코친에서 죽었다.

 

베드로[Peter the Apostle , ?~AD 64 ?]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 흔히 수제자()라고 일컫는다. 원래 이름은 '시몬(Simon)'이라는 그리스식 이름이었는데, 예수가 그에게 '케파(Cephas:반석이라는 뜻)'라는 아람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 '페트로스'이다. 【복음서에서의 베드로】 그는 어부로서, 원래는 베싸이다에 살았으나,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쯤 결혼을 하여 가파르나움에 살았다. 《요한의 복음서》에 따르면, 시몬은 베타니아에서 예수를 만나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고 제자가 되었다. 한편, 공관복음()은 그 장소가 갈릴레아였다고 전한다. 어쨌든 성서에는 그가 출중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의 지도력은 여러 경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제자들 전체를 대표하며, 제자들의 이름으로 '약삭빠른 종들'의 비유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한다(루가 12:41). 또 예수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었을 때, 메시아라고 선언한 것도 베드로였다(마태 16:16, 마르 8:29, 루가 9:20).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12제자를 열거할 때 베드로를 제일 앞에 둔다. 베드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언한 첫번째 사도였고, 교회가 세워질 반석(그 이름 그대로)으로 선택되었다(마태 16:16∼19). 이 사실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도 확인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수난 때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고, 부활 후 그에게 특별히 나타내 보였다고 한다. 【초대교회 전승에서의 베드로】 예수의 승천 후, 베드로는 명실공히 교회의 으뜸가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마티아를 새로운 사도의 일원으로 뽑을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른바 오순절() 이후 ‘성령의 도움으로’ 많은 군중에게 설교하여 교도 수가 급증하였다. 또 그는 사도들 중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여, 절름발이를 고쳤다(사도 3:1∼11). 그 후 헤로드 아그리파 1세에게 체포되었으나 기적에 의해 풀려났다. 전승()에는 그가 로마로 가서 바울로와 함께 로마교회를 세우고, 네로의 치하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2세기 후반~3세기에, 베드로의 로마 체류와 순교는 거의 확실한 것으로 믿어져 왔다. 또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티칸 언덕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말은 로마의 사제 가이우스가 하였는데,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그 점을 입증하였다. 바울로가 이방의 그리스도 교인들의 사도였다면 베드로는 유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사도였다. 오늘날까지 2,000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교회의 교황 수위권(, Primacy)은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6절 이하에 의거한 베드로의 사도적 수위권(로마의 초대 주교로 인정)에 그 전통의 기원과 의의를 두고 있다.

 

베토벤[Beethoven, Ludwig van , 1770.12.17~1827.3.26]

  독일의 작곡가.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인 고전성()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보카치오[Boccaccio, Giovanni , 1313~1375.12.21]

  이탈리아의 소설가. 파리 출생. 단테의 《신곡()》에 대해 ‘인곡()’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단편소설집 《데카메론》을 지어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칭송된다.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피렌체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파리에 있을 때 어느 공주와 사랑을 맺어 생긴 자식이라는 말이 있다. 또 그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엄한 계모를 피하여 나폴리에 왔다가 로베르토왕의 서출()인 마리아(그의 작품에서는 피아메타라고 부른다)와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위하여 소설가가 되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전하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가 모두 부정되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 스승의 영향으로 단테의 위대함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평생토록 단테를 존경하였는데, 후에 《단테전() Vita di Dante》(1364)을 집필한 일과 만년에 피렌체의 교회에서 《신곡》 강의를 한 사실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가 문학자로서의 천재성이 성숙되어 《데카메론》의 전제가 되는 작품을 쓰고, 또 《데카메론》의 내용이 되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업을 익히려고 간(1325∼1328) 활기찬 항구도시 나폴리에서, 그리고 근무처인 바르디은행의 융자로 번영하고 있던 안주 왕가()의 로베르토왕의 궁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에서 화려하고 방종한 향락생활도 직접 경험하였으나 1340년에 바르디은행이 파산하자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상인도 못되고 문학자도 못된 초조감 때문에 생애의 중도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348년 페스트가 피렌체에 퍼지자, 많은 주민들이 죽어갔다. 서화()에서 이를 상세히 그린 그의 대표작 《데카메론》은 이 해부터 1353년까지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전기() 인문주의기() 문단의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반 민중으로부터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바르디은행의 지점을 통하여, 외국에까지 퍼져나갔고 서민들 사이에 급속히 보급되어 거리에는 변사들이 그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인쇄술도 없었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 형식의 단편문학이 퍼진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이탈리아어는 이른바 보카치오식 산문이라는 것으로서, 오래도록 산문의 본이 되었다. 그의 재능과 학식 ·웅변은 피렌체 시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시정부는 그를 사절로 삼아 각지에 파견하였다. 인문주의자로서의 보카치오의 활동에는, 1350년에 밀라노에서 만난 페트라르카(1304∼1374)의 영향이 크다. 또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가 신앙적인 위로를 구하였을 때, 맹신()에 흐르는 것을 막아 주었으며, 수도사 차니의 협박으로 그의 모든 산문작품을 태워버리려고 하자 현명한 충고로 이를 저지하였다. 1373년 피렌체에서 《신곡》을 강의하였으나, 병 때문에 몇 달 후에 중단하고, 첼타르도에 은퇴하여 사망하였다. 작품으로는 《데카메론》과 초기의 연애소설 《필로콜로》 《피아메타》, 여성을 비난한 《코르바치오》, 운문소설 《필로스트라토》 《피에졸레의 요정》, 라틴어 논문 《이교() 신들의 계보》 등이 있다.

 

볼테르[1694.11.21~1778.5.30]

  프랑스의 작가, 대표적 계몽사상가. 파리 출생. 유복한 공증인의 아들로 예수회 학교 루이 르 그랑에서 공부하였다. 1717년에 오를레앙공()의 섭정()을 비방하는 시를 썼다 하여 투옥되었는데, 비극 《오이디푸스 d’Þdipe》를 옥중에서 완성하고, 1718년에 상연하여 성공을 거둔 다음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바꾸었다. 그 후 한 귀족과의 싸움으로 재차 부당하게 투옥되었으며, 국외망명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제정치하의 불평등에 환멸을 느끼고 1726년에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면서 타고난 비판정신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종교전쟁을 끝나게 한 앙리 4세를 찬양하는 서사시 《앙리아드 Henriade》(1728)를 출판한 후, 1729년에 귀국하였으며, 셰익스피어극의 영향을 받은 사상극 《자이르 Zaïre》(1732)를 발표하였다. 이어 《철학서간(영국서간) Lettres philosophiques ou Lettres sur les anglais》(1734)을 통하여 영국을 이상화하고 프랑스 사회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노여움을 샀다. 그 후 애인 뒤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에서 1734년부터 10년 간을 저술과 연구로 보냈다. 그동안 희곡 《마호메트 Mahomet》(1741) 《메로프 Mérope》(1743), 철학시 《인간론》(1738) 등을 발표하였다. 1744년에 친구의 외무장관 취임과 함께 프랑스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746년에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으로 뽑혀 역사 편찬관이 되었으나, 또다시 궁정의 반감을 사서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175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빙으로 베를린에 가서 역사서 《루이 14세의 세기 Le Siècle de Louis XIV》(1751)를 완성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그 후 수년 동안 제네바에 머물다가, 1761년에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페르네의 한촌()에 들어갔다. 1778년에는 자작()인 《이렌 Irene》의 상연을 위해 파리에 갔다가 병사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이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페르네의 장로()’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반봉건 ·반교회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많은 공격적 문서를 발표하였는데, 종교적 편견에 의한 부정재판을 규탄한 칼라스 사건(1761) 등의 실천운동도 유명하다. 그 성과인 《관용론()》(1763)과 세계문명사인 《풍속시론()》(1756), 철학소설 《캉디드 Candide》(1759)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1764)이 만년의 대표작이다. 볼테르의 생전에는 많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간결한 문체의 《자디그 Zadig》(1747)나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그리고 문명사적 관점에 따른 역사 작품이 더 높이 평가된다. 한편, D.디드로, J.J.루소 등과 함께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한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비스마르크[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 1815.4.1~1898.7.30]

  독일의 정치가.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공적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1839).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는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투르크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 ·질병 ·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 ·카메룬(1884), 독일령 동()아프리카(1885) 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자가 늘어갔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비스마르크는 곧 그와 충돌, 1890년에 사직하였다. 그의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3권,1898∼1919)은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Victoria, Queen , 1819.5.24~1901.1.22]

  영국의 왕(재위 1837~1901). 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 하노버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백부()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의 앨버트공()과 결혼하였다. 독일 출신인 공은 영국에서 백안시()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의 제관()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 ·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그리하여 강한 개성으로 강경하게 적극 외교를 밀고 나가는 H.J.파머스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글래드스턴의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

 

빌헬름 1세[Wilhelm I , 1797.3.22~1888.3.9]

  프로이센의 왕(재위 1861~1888), 독일 황제(재위 1871~1888). 순수한 무인()이었으며, 1840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위 계승 예정자가 되었다. 1848년의 3월혁명 때 반동파의 중심인물로 지목되어, 런던으로 피신하였다. 1858년 왕이 병들자 섭정()이 되었으며, 1861년 왕위에 오른 뒤에는 독일 제패()를 위한 프로이센 군국화()의 숙원을 실천에 옮겼다. 즉, A.v.론을 육군장관으로 앉히고 H.v.몰트케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여 군비강화를 꾀하였다. 예산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기용하여, 그의 철혈정책()으로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1866년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북독일연방을 조직하였으며, 1870~18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혈연관계로 러시아와 친하였기 때문에,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보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정책()에 반대한 적도 있었으나, 제국의 내정()과 외교정책은 거의 모두 비스마르크를 믿고 그 수완에 일임하였다.

 

사르트르[Sartre, Jean-Paul , 1905.6.21~1980.4.15]

  프랑스의 작가·사상가.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2세 때 아버지와 사별하여 외조부 C.슈바이처의 슬하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나병 환자의 구제사업을 벌여 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 파리의 명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 다녔는데, 동급생 중에는 M.메를로 퐁티, E.무니에, R.아롱 등이 있었다. 특히 젊어서 극적인 생애를 마친 폴 니장과의 소년시절부터의 교우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평생의 반려자가 된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해후도 그 때의 일이다. 졸업하고 병역을 마친 후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루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이 포구는 후일 《구토》(1938)에서 묘사된 부비르라는 도시의 모델이라 한다. 1933년 베를린으로 1년간유학, E.후설과 M.하이데거를 연구하였다.저서 《자아의 극복 Transcendance de l’Ego》(1934) 《상상력 L’Imagination》(19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1938년에는 소설 《구토》가 간행되었는데,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1939년 9월 참전하였다가 이듬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1941년 수용소를 탈출, 파리에 돌아와서 문필활동을 계속하였다. 장편소설 《자유의 길》(1945∼1949)의 대부분과 《시튀아시옹 Situations》(1947∼19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존재와 무》(19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작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지()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에서 밝혀 두었는데, 그가 말하는 ‘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구토》나 《존재와 무》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생 주네 Saint Genet》(1952)는 《도둑 일기》의 작가 주네의 평전()이다. 《변증법적 이성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인데,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카뮈와도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도 많은 극작을 발표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파리 Les Mouches》(1943) 《출구 없음 Huis-clos》(1944) 《무덤 없는 사자》(1946) 《더럽혀진 손 Les Mains sales》(1948) 《악마와 신 Le Diable et le Bon Dieu》(1951) 《알토나의 유폐자들》(1959) 등은 그 사상의 근원적인 문제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 때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현상화한 것으로 주목된다.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사마천[ , BC 145 ?~BC 86 ?]

  전한의 역사가. 《사기()》의 저자. 자 자장(). 용문(: 현재 ) 출생. 사마 담()의 아들. 7세 때 아버지가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이 된 이후 무릉()에 거주하며 고문을 독서하던 중, 20세경 낭중()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 ·산둥[] ·허난[]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BC 111년에는 파촉()에 파견되었고, BC 110년에는 무제의 태산 봉선() 의식에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크게 견문을 넓혔고, 《사기》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원전 110년 사마 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고, 그 유지를 받들어 BC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러나 저술에 몰두한 그는 흉노의 포위 속에서 부득이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벗 이릉() 장군을 변호하다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BC 99년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았다. <보임안서()>라는 명문에서 당시 《사기》의 완성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심정을 술회하였는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이 되었으며, 기원전 90년에는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석가모니[ , BC 563 ?~BC 483 ?]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 ·석가문()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 ·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 이름은 "싯다르타"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라는 의미의 여래(), 존칭으로서의 세존() ·석존() 등으로도 불린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을 중심으로 샤키야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와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 ·감로반()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가, 1896년에 발견 ·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 》 《대사()》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역대삼보기()》에 전하는 중성점기(), 즉 불멸() 후 최초의 율장()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나라의 영명()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 ·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와 사문()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 또는 사문유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을 건너 마가다국()의 왕사성(城)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 ·비상비비상처정(非非)이라는 선정()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 · · ·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 ·십이인연() ·사선삼명()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의 간절한 권청()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 · · 또는 를 빼고 을 넣기도 한다) ·사제 ·팔정도(: · · · · · · ·) ·무기(: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 ·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 ·오온(: · · · ·의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 ·육근(:법의 분류로서 · · · · ·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 · · · ·의 객체, 즉 6을 더한 와, 거기에 등의 6식을 추가하여 를 말하기도 한다) ·연기(: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 ·열반 ·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 혹서의 중부인도()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 ·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의 숲에 이르렀을 때,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화장)되고, 그 유골[]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진리로서의 불타) ·보신(:보살의 ·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 ·응신(: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 ·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 ·성도 ·입멸의 월 ·일에 관하여 최고()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 ·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 ·성도 ·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 ·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 · · · · · ·鹿 ·)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세르반테스[Cervantes (Saavedra), Miguel de , 1547.9.29~1616.4.23]

  에스파냐의 소설가·극작가·시인. 1547년 9월 29일 에스파냐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출생하였다. 소설 《돈 키호테 Don Quixote》(1605)의 작가이다. 가난한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568년 마드리드에서 로페스 데 오요스의 사숙()에서 잠시 공부한 것 외에는 학교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다. 이듬해 이탈리아에서 아크콰비바 추기경을 섬기고, 이어서 이탈리아 주재 에스파냐 군대에 입대하여 1571년 역사상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가, 가슴에 두 군데, 왼손엔 평생 사용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1575년 에스파냐 해군 총사령관이며 왕제()인 돈 후안의 표창장을 받고 에스파냐로 귀국하던 도중, 당시 지중해에 횡행하던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1580년까지 5년간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1584년 18년 연하인 카타리나라는 부유한 농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에 처녀작 소설 《라 갈라테아 La Galatea》를 출판하였다. 1587년까지 20∼30편의 희곡을 쓴 것으로 전해지나, 《알제리의 생활》과 《라 누만시아》 등 2편만이 현재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 후 문학을 버리고 일개 무명의 세금 수금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몇 번인가 투옥당하기도 하며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605년 명작 《돈 키호테》 제1부를 출판하였다. 출판과 함께 세상의 갈채를 받았으나, 여전히 빈궁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출판 직후 어느 변사사건과 관련된 혐의를 받아 한때 가족과 함께 구속된 적도 있었다. 그 후 1615년 《돈 키호테》 제2부를 출판하기까지 12편의 중편을 모은 《모범 소설집 Novelas exemplares》(1613), 동시대의 시인을 평한 장시 《파르나소에의 여행 Viage del Parnaso》(1614) 《신작 희곡 8편 및 막간희극 8편 Ocho comedias, y ocho entremeses nuevos》(1615)을 출판하였다. 만년에는 종교적인 결사에 가담하고, 1611년 프란시스코 데 실바가 창립한 아카데미아 셀바헤라는 작가 단체에 가입하였다. 그는 1616년 4월 23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는데, 이 날은 W.셰익스피어 사망일과 같다. 《돈 키호테》의 정식명칭은 《재치 발랄한 향사() 돈 키호테 데 라 만차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로, 작가 자신이 “유행하고 있는 기사()이야기의 인기를 타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와 같이,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한 기사 이야기의 패러디에서 출발되었다. 이 작품의 중심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두 성격의 창조로,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자의 실제적이고 비속한 물질주의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며, 인간성의 양면을 나타낸다. 두 사람의 보편적인 인간성은 국적·인종·나이·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묘사의 요령을 알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였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 William , 1564.4.26~1616.4.23]

  영국의 시인·극작가. 1. 생애 1564년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이었고,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을 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읍장까지 지낸 유지였으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는 훌륭한 초·중급학교가 있어서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기본적 고전교육을 받았으며, 뒤에 그에게 필요했던 고전 소양도 이 때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생각되며, 상경의 동기가 극단과 어떤 관계였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으나, 1592년에는 이미 그가 유수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선배 극작가인 R.그린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590년을 전후한 시대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에서 국운이 융성한 때였으므로 문화면에서도 고도의 창조적 잠재력이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배경을 얻어 그의 천분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당시의 연극은 중세 이래의 민중적·토착적 전통이 고도로 세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소생시킨 르네상스 문화의 유입()을 맞아 새로운 민족적 형식과 내용의 드라마를 창출해 내려는 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592∼1594년 2년간에 걸친 페스트 창궐로 인하여 극장 등이 폐쇄되었고, 때를 같이하여 런던 극단도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부터 신진극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 본격적인 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당시의 극계를 양분()하는 세력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당시는 유력자를 명목상의 후원자로 하여 그 명칭을 극단에 붙이는 것이 관례였다)의 간부 단원이 되었고, 그 극단을 위해 작품을 쓰는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그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1593)와 《루크리스 Lucrece》(1594) 등 두 편의 장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모두 37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을 시기별로 구분해 보면, 초기에는 습작적 경향이 보였으며, 영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역사극에 집중하던 시기, 그것과 중복되지만 낭만희극을 쓰던 시기, 그리고 일부의 대표작들이 발표된 비극의 시기, 만년에 가서는 화해()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른바 로맨스극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기적 구획()이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연극인으로서 충실하게 보냈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극단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했다. 1599년 템스강() 남쪽에 글로브극장(The Globe)을 신축하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의 허락을 받아 극단명을 ‘임금님 극단(King’s Men)’이라 개칭하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당시의 관례였을 뿐 상업적인 성격을 띤 일반 극단과 차이가 없었다. 1613년 그의 마지막 작품인 《헨리 8세》를 상연하는 도중 글로브극장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6년 4월 23일 52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2. 작품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19편 정도이고, 1623년 이후 동료들에 의하여 전집이 간행되었다. 이 전집은 이절판(folio)의 대형판으로 전작품 37편이 모두 들어 있다. 당시의 극본은 관례상 출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알려진 E.K.채임버즈 교수의 추적에 의한 작품명 및 창작 연대는 다음과 같다. 1590∼1591년 《헨리 6세 2부·3부》, 1591∼1592년 《헨리 6세 1부》, 1592∼1593년 《리처드 3세》 《실수의 희극》, 1593∼154년 《타이터스·앤드로니커스》 《말괄량이 길들이기》, 1594∼1595년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로미오와 줄리엣》, 1595∼1596년 《리처드 2세》 《한여름밤의 꿈》, 1596∼1597년 《존왕》 《베니스의 상인》, 1597∼1598년 《헨리 4세 1부·2부》, 1598∼1599년 《헛소동》 《헨리 5세》, 1599∼1600년 《줄리어스 카이사르》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1600∼1601년 《햄릿》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1601∼1602년 《토로일러스와 크레시다》, 1602∼1603년 《끝이 좋으면 다 좋아》, 1604∼1605년 《자에는 자로》 《오셀로》, 1605∼1606년 《리어왕》 《맥베스》, 1606∼1607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1607∼1608년 《코리오레이너스》 《아테네의 타이먼》, 1608∼1609년 《페리클리즈》, 1609∼1610년 《심벨린》, 1610∼1611년 《겨울 이야기》, 1611∼1612년 《폭풍우》, 1612∼1613년 《헨리 8세》 등이다. 이상의 작품 연표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습작기에 쓴 것은 영국사극과 희극이다. 영국사극은 모두 10편을 썼으나 그 중 8편은 중세 후기, 주로 영국·프랑스 양국간의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두 왕가() 사이의 권력투쟁의 과정을 극화한 것이다. 따라서 집필 연도순과는 관계없이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2부》 및 《헨리 5세》를 묶어서 1398∼1420년까지의 4부작으로, 《헨리 6세 1부·2부·3부》 《리처드 3세》를 묶어서 1422∼1485년까지의 4부작으로 각기 생각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을 일괄해서 볼 때, 헨리 7세 및 헨리 8세에 의해 정치적 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이 이룩되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근세국가로서 크게 도약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본 관점이 이들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봉건적 질서가 내부붕괴를 일으키면서 골육상쟁이 유발하는 처참한 피의 역사가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고, 유혈과 찬탈의 연쇄적 과정이 젊은 극작가의 눈에 생생하게 비춰지고 있다. 한편, 초기 희극 《실수연발 Comedy of Errors》과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는 각기 라틴 희극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희극에서 내용과 수법을 빌려온 것으로 젊은 극작가의 습작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에서도 이미 자신이 배울 것과 새로 보태야 할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으며, 뒤이을 자신의 희극세계의 구축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594∼1600년에 걸쳐 창작된 일련의 희극,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등은 흔히 낭만희극이라 불리며,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정적 분위기와 재담()·익살·해학 등 희극 고유의 요소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젊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말(결혼)에 이르는 낭만희극의 정석()을 보여 주면서도 그는 사랑의 풍요함과 사랑의 병, 그리고 변신()의 능력에서부터 사랑의 변덕스러움·장난, 그 파괴적 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문화의 전통에 따르는 것이지만, 이를 작품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결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가 확대와 깊이를 더한 것은 역사극과 낭만희극을 쓰고 난 뒤, 비극 작품을 쓰면서부터이다. 대체로 1600∼1608년까지의 이 시기에 그는 대표작인 4대비극을 중심으로 로마 역사에서 소재를 얻은 3편의 로마 사극, 그리고 희극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이전의 정통희극과는 달리 암울한 색조가 짙은 이른바 문제희극() 3편도 써냈다. 본격적인 비극작품을 쓰기 전에 이미 초기에 쓴 2편의 비극, 즉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으나 이 작품의 명성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1660년 이후에 쓰인 4대비극을 능가할 수가 없었다. 그의 대표적인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쓴 《햄릿 Hamlet》은 하나의 복수비극으로, 주인공인 왕자의 인간상은 사색과 행동, 진실과 허위, 양심과 결단, 신념과 회의 등의 틈바구니에서 삶을 초극해 보려는 한 인물의 모습이 영원한 수수께끼처럼 제시되고 있다. 두 번째 작품 《오셀로 Othello》는 흑인장군인 주인공의 아내에 대한 애정이 악역 이아고(Iago)의 간계()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나 심리적 갈등보다는 인간적 신뢰가 돋보이는 작품의 하나이다. 세 번째 작품 《리어왕 King Lear》도 늙은 왕의 세 딸에 대한 애정의 시험이라는 설화적() 모티프를 바탕으로 깔고 있으나 혈육간의 유대의 파괴가 우주적 질서의 붕괴로 확대되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다. 인간성의 선·악의 문제가 이처럼 근원적 차원에서 다뤄진 작품은 좀처럼 찾기 힘들며, 또한 삶이 원초적으로 비극을 내포하고 있음을 조명()한 경우도 드물다. 마지막 작품인 《맥베스 Macbeth》에서도 권력의 야망에 이끌린 한 무장()의 왕위찬탈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말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정치적 욕망의 경위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영혼의 절대적 붕괴라는 명제를 집중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주인공 맥베스는 악인이면서도 우리에게 공포와 더불어 공감을 자아내게 해준다. 4대비극은 셰익스피어극의 절정이자 세계문학의 금자탑()으로서 이 시기에 씌어진 로마 사극도 비슷하게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다. 《줄리어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는 이상주의자 브루투스와 현실정치가 안토니우스의 대결을 통하여 브루투스의 패배에서 얼핏 햄릿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을 표출하였다는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뛰어난 자기완결적()인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3. 명성과 평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의 극자가였던 B.존슨은 “당대뿐 아니라 만세()를 통해 통용되는 작가”라고 말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는 뛰어난 시인·극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숭앙()이 절정에 도달한 것은 19세기 초 낭만파 시인·비평가들이 그를 재평가함으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비평도 깊이를 더했다. S.T.콜리지, C.램, W.해즐릿 등이 바로 이에 기여했던 대표적 문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낭만적 셰익스피어상()은 20세기에 들어와 크게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며 학문적·비평적 연구의 큰 성과와 더불어 그를 16세기의 극작가이자 동시에 20세기에 사는(때로는 동시대 작가처럼 보고자 하는) 작가로 보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작품해석이 다양하게 전개될 뿐 아니라 고전의 ‘살아 있는’ 모델로서 셰익스피어를 대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한편, 작품이 영어로 씌어져 있음에도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은 이미 19세기 이후에 두드러졌다. 세계 각국에서 자국어()로 번역 출간하여 읽는 셰익스피어에 못지 않게 또한 무대 위에서도 보는 셰익스피어가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셰익스피어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개화기() 초에서부터였으나 그 때는 단편적인 소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소개는 1923년 현철()에 의한 《햄릿》의 완역() 출판이 시초이다. 1920년대에는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 소개가 있었으나 모두 단편적이었으며, 1930년대에 와서 극예술협회에 의한 《베니스의 상인》 공연이 있었고, 이것도 법정장면만을 다룬 부분적인 소개였다. 이 밖에 학교극으로서 셰익스피어가 상연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가 소개된 것은 해방 후인 6·25전쟁 이전에 김동석의 《셰익스피어 연구》, 설정식의 《햄릿》 번역이 나왔고, 1950년대에 들어와 각 대학의 셰익스피어 강의가 보편화되었으며, 세계문학출판이 활기를 띠면서부터 학문적 연구·번역·공연 등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1953년 이후 수년간에 걸친 극단 신협()에 의한 일련의 셰익스피어극 공연은 공연내용과 관객동원이 다같이 수준 이상의 평을 받았으며, 강단에서는 최재서()의 업적이 크다. 이어, 1960년대에 들어와 셰익스피어 공연은 본격화되었고, 1964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행사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에 앞서 1963년에 한국 셰익스피어협회가 결성되고 회장에 권중휘()가 취임했으며, 1964년에는 김재남()이 개인 전역()으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출간했다. 동시에 정음사()판 셰익스피어 전집이 여러 역자에 의해 출간되었다. 또한, 1968년부터 셰익스피어 협회편으로 그의 주요작품 15편의 주석본()이 나와 한국 셰익스피어 학계의 수준을 돋보이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크라테스[Socrates , BC 469~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과 사()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솔로몬 왕[Solomon , ?~BC 912 ?]

  이스라엘 왕국 제3대 왕(재위 BC 971∼BC 932).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부왕 다윗의 명에 의하여 그 후계자가 되었다. 구약성서 중 《아가()》 《잠언()》 등이 그의 작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한 아기를 놓고 두 어머니가 싸우는 것을 재판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반대파를 누르고, 대외평화에 힘을 쏟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룩함으로써 후세 '솔로몬의 영화()'로 일컬어지는 융성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국내 부족간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한데다, 징병·징세·강제노동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까지 제고되어, 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페니키아로부터의 자재와 기술에 의하여 웅장한 신전을 예루살렘에 건설하고, '계약의 궤(법궤, 언약궤 등으로도 번역되었음)'를 안치하여 종교적인 중심을 확립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종래의 부족제를 무시하고 전국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장관을 파견하여 징세나 부역의 사무를 맡게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교역의 요지에 위치하여 통행세를 징수한 외에 이집트, 페니키아, 아랍 등과의 통상을 장려하였고, 조선소()·제동소()도 설치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솔론[Solon , BC 640 ?~BC 560 ?]

  아테네의 정치가 ·시인. 그리스 7현인()의 한 사람으로서, 명문이지만 중류 재산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살라미스섬의 영유를 둘러싼 메가라인()과의 싸움(BC 596)에서 명성을 얻은 결과, BC 594년 집정관 겸 조정자로 선정되어 정권을 위임받았다. 당시 빈부의 극심한 차이에서 빚어진 사회 불안을 개선하기 위하여 ‘솔론의 개혁’이라 일컫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부채의 조정 포기’와 ‘채무 노예의 해방과 금지’를 단행하여 가난한 사람의 구제에 힘썼다.이어서 토지재산의 다과에 따라 시민을 ① 500석급(:Pentakosiomedimnoi), ② 기사급(Hippeis), ③ 농민급(Zeugitai), ④ 노동자급(Thetes)의 4등급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를 제한하였다. 그러나 최하급 제4급의 노동자라도 민회()에 참석하거나 재판에 호소할 수 있었다. 또한 4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신설하고, 오래 된 드라콘법(BC 621년 공포) 중 살인에 관한 조항 외에는 모두 폐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였다.도량형()을 개정하고 외국에서 수공업자를 초청하였으며, 올리브 이외의 농산물 수출을 금지하는 등 경제적인 여러 개혁도 단행하였다. 그러나 토지의 재분배를 기대한 빈민은 토지개혁을 단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자는 대부금의 조정 포기 및 소유 노예의 해방으로 인하여 입은 손실 때문에 모두 솔론의 개혁에 불만을 품었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솔론은 상업과 관광을 겸하여 이집트 ·키프로스 ·소아시아에까지 외유하였다. 그러나 그가 리디아왕() 크로이소스와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헤로도토스의 말은 연대상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것 같다. 귀국 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에 대한 야망이 있음을 알고 이를 반대하여 시민을 만류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에레게이아 기타의 시형()으로 쓴, 그의 서정시는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당시의 아테네 사회나 그의 정치적 입장 및 현인의 면목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순자[ , BC 298 ?~BC 238 ?]

  중국 전국 시대 말기의 사상가. 성 순(). 이름 황(). 조()나라 사람. 순경() ·손경자() 등으로 존칭된다. 《사기()》에 전하는 그의 전기는 정확성이 없으나, 50세(일설에는 15세) 무렵에 제()나라에 유학()하고, 진()나라와 조나라에 유세()하였다. 제나라의 왕건(:재위 BC 264∼BC 221) 때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 직하()의 학사() 중 최장로()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곳을 떠나 초()나라의 재상 춘신군()의 천거로 난릉(:)의 수령이 되었다. 춘신군이 암살되자(BC 238),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고장에서 문인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상】 순자의 사상은 공자() ·자궁()을 스승으로 하고 유가()의 실천 도덕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들보다 한층 합리적이며, 더욱이 전국사상()의 여러 유형을 지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사적() 위치는 서양 철학사()상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교된다. 순자는 인간을 공동체 ‘군’ 안에서의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 궁극의 실천목적을 묵가()의 사상을 취하여 그 공동체, 즉 윤리적 질서체()의 이념에 둔다. 그 질서는 법가적()으로, 개인의 ‘분수’ 를 타율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보나,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유기적 ·합목적적 격률(的的 ) ‘성왕()의 제()와 예의’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리하여 객관적 규범에 의한 실천적 합리론()이 형성된다. 전통적인 종교 관념 ‘하늘[]’에 대하여서도 비판적이고 현실적이며, 유명론적()인 명가사상()에 대하여서 역시 비판적이다. 그리하여 실념론적() 입장에서 개념 종속 관계와 범주론()을 거론하는 진보된 논리적 사고를 나타내며, 오직 명사()의 타당성은 합목적사회관습() ‘왕제()’에 의하여 정해지는 것이 특징적이다. 노장()의 변증적() 사변()의 영향을 받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사상과는 가장 대조적이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욕()과 지()가 있는 자주적 목적체()로 보는 유가() 부동()의 바탕에 선다. 동시에 원존재()와 의의활동()을 구별하고, 특히 후자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합리적 인위()인 ‘위()’ 주의를 주장하였다. 종래 한동안 순자는 ‘성()은 악()이고, 선()한 것은 위()’라는 성악론자()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맹자처럼 인간성의 직접 확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생득적()인 의욕을 악한 것이라 부정함으로써 선한 의의활동이 있다(이 점은 제나라의 유심론적 영향이라 하겠다)는, 즉 인간의 정신은 주관적으로는 다면()으로 작용하나 그것을 부정하여 객관적 규범에 귀일()함으로써 후자의 목적으로 전환하고, 더구나 자주적인 자율과 타율, 개인과 공동체와의 일치된 합리적 실천이 완수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예의의 ‘학()’적 수련과 정신의 심화()에 의하여 규범목적의 터득과 인륜의의()의 충족 정도에 따라 사()와 군자()의 인격의 진보가 있고, 실천 목적과 질서 이념의 완전 일치는 마침내 성인(), 왕자로서 인륜의 완전체()를 영위한다고 한다. 그의 정치 사상은 강력한 예치주의()를 취한다. 순자의 사상은 하나의 유가사상()의 완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 송대() 학자들의 비난은 순자의 맹자 비판과 성악설()의 오해에 의한 것일 뿐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또 순자의 유가경전()을 전한 공적이 인정된다. 한비() ·이사()가 순자의 제자였다는 설은 의심스럽다. 그 사상의 획일성과 현실적 요구에서 진() ·한()의 제국주의가 편승하기 쉬운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진 ·한초()에 그의 학파가 활동한 것을 보아도 오히려 전제주의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이었다. 한갓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주관적 실천설에서, 《여씨 춘추()》가 미숙하기는 하나 계승을 나타내고 있듯이 합리적 윤리 사상으로의 전환의 거보()를 내딛고 있는 것인데, 아직 전통에의 의존과 실천합목적관()의 제한에 불철저함이 있었던 것이다. 순자의 저술은 당시 이미 성문() 부분이 있었으나, 현존의 《순자》 20권 32편은 한나라의 유향()이 당시 있었던 322편을 편집하여 《손경신서()》 32편으로 편찬한 것을, 당()나라의 양량()이 편()의 순서를 바꾸고 주()를 붙여 《손경자()》라 하였고, 후에 간단히 《순자》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한 부분은 순자의 문인()의 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순자》에는 부() 10편의 저작이 있으며 지금은 2편으로 줄여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