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발디[Garibaldi, Giuseppe , 1807.7.4~1882.6.2]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헌신한 군인, 공화주의자. 프랑스 니스에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르디니아 해군에 복무중 청년 이탈리아당의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834년 관헌에 쫓겨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프랑스에서 남미로 건너간 그는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848년 해방전쟁이 일어나자 귀국, 의용군을 조직하여 참가하였으나 패배한 후 로마의 혁명공화정부에 참가하여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대한 방어전을 지휘하였다. 이듬해 공화정부가 붕괴되자 뉴욕으로 망명하였다가 1854년 귀국하여 카프레라섬에서 살았다. 이 무렵부터 공화주의로부터 사르데냐왕국에 의한 이탈리아통일주의로 전향, 1859년의 해방전쟁에서는 알프스 의용대를 지휘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남이탈리아왕국을 점령, 사르디니아왕에 바침으로써 이탈리아통일에 기여하였다. 한때 카프레라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늦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18 62년과 1867년에 의용병의 로마탈취를 시도하였다가 실패, 카프레라섬에 연금되었다. 1870년 L.강베타의 모병에 호응하여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이듬해 보르도 국민의회에 선출되었으나, 프랑스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아 다시 카프레라섬으로 돌아와 사회사업 등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간디[1869.10.2~1948.1.30]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 ·사상가. 서부의 포르반다르 출생.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다. 1887년 18세 때 런던에 유학하여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1년간의 계약으로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 연방의 더반으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은 간디의 생애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7만 명의 인도 사람이 이주해 있었는데 백인에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거기에 사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남아프리카 연방 당국에 대한 인종차별 반대투쟁단체를 조직, 1914년까지 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 동안 진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을 하였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 아힝사(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를 중심으로 하는 간디주의를 형성하였다. 간디 자신이 전개한 인종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사티아그라하:satyagraha) 및 자기실현을 위한 인격의 도야와 수양()의 노력은 어느 것이나 훗날 간디가 인도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모형이 되었고, 또한 아슈라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도인의 정신개조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초의 사티아그라하 투쟁은 1906년 아시아인 등록법을 제정한 트란스발주()에서 일어났다. 이 투쟁은 그로부터 약 8년 동안 인두세()를 비롯한 여러 차별법에 반대하기 위하여 계속되었으며, 남아프리카의 여러 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13년에 44세가 된 간디가 선두에 서서 행진한 나탈주()에서 트란스발주까지의 ‘사티아그라하 행진’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간디를 비롯한 행진 참가자 4,000명은 남아프리카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악법을 반대하는 주장은 세계적 여론의 동정을 모아 당국을 굴복시켰다. 결국 아시아인 구제법이 제정되어 인도인에 대한 차별법은 모두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투쟁으로 간디는 남아프리카의 간디에서 일약 세계의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명을 다한 간디는 1915년에 귀국하였는데, 정치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토지분쟁의 해결 등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인도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전쟁 후 영국의 배신과 1919년의 롤라트 법안(Rowlatt Act)과 같은 반란진압조령()의 시행 때문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인도 여러 곳을 두루 순회하였고 수방(:charkha)운동을 장려하였다. 1919년 인도국민회의파의 연차대회에서는 간디의 지도 하에 영국에 대한 비협력운동 방침이 채택,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을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반영 ·비협력 운동이 선언되고 외국제 직물의 불매운동은 성공하였으나, 인도 각지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1922년 간디의 호소로 운동은 잠시 중지되었다. 그 동안 간디는 투옥되었다가 풀려 나왔으며, 1924년부터 1년간 인도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수방운동으로써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1929년의 연차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완전독립을 선언하였고, 61세가 된 간디는 1930년 3월에 사티아그라하운동의 지지자들을 이끌고 소금세 신설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구금되었으며, 1931년 석방 후, 어윈 총독과 절충한 결과, 간디어윈 협정을 체결하여 반영() 불복종운동을 중지하였다. 간디어윈협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탄압정책을 쓰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불복종운동을 재개하여 투옥되었다가 1932년 석방된 이후부터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에 진력하였다.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은 인도의 찬성을 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에 투입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한 인도는 완전독립의 약속을 얻어 내려고 노력하였으나, 상반된 이해관계로 타결을 보지 못하고, 1942년의 봄베이대회에서 국민회의파는 영국세력의 즉시 철퇴를 요구하여 공전의 대규모 반영불복종운동에 돌입하였다. 이로 인해 간디는 73세의 노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전쟁 후에는 인도를 하나의 감옥으로 보고 전화()와 굶주림으로 거칠어진 인심에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기 위하여 인도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힌두 ·이슬람의 화해에 따른 인도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주권을 넘겨줌에 있어서 인도의 대정당인 국민회의파와 전인도() 이슬람 연맹이 인도를 둘로 분할 독립할 것을 협정한 결과 오히려 격렬한 힌두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졌다. 1947년 7월 인도가 이러한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을 때, 간디의 나이는 78세였으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가장 격화되어 있던 벵갈에서 힌두 ·이슬람의 융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l월, 이 활동의 행선지를 뉴델리로 연장, 뉴델리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인 한 청년의 흉탄에 쓰러졌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타고르의 방문을 받아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으나, 인도에 있어서는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사상에 입각하여 평화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디의 주저 《인도의 자치()》에서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서구사상(西)은 그의 단편적인 편모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평화사상과 평화에 바친 업적은 실천면에서 볼 때 민주적 민족주의자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특히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갈릴레이[Galilei, Galileo , 1564.2.15~1642.1.8]

  이탈리아의 천문학자·물리학자·수학자. 피사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바론브로사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5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15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습작()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15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단한 군사기술 입문》 《천구론() 또는 우주지()》 《축성론()》 《기계학》은 이 시기의 저서이다. 베네치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 ·귀족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04년의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의 개념도 이미 그 전에 사르피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 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완전한 구()라고 믿었던 달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목성()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1610년에 이러한 관측결과를 《별세계의 보고》로 발표하여 커다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에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토스카나대공()인 메디치가()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천문관측을 계속하여 1612∼1613년에 태양흑점 발견자의 명예와 그 실체의 구명()을 둘러싸고, 예수회 수도사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여,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에 발표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를 써 보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6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1623년에 《황금계량자()》라는 책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수량적()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 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의 집필에 힘써,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16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에 올랐으며, 1633년 1월에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고, 몇 가지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심문소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 중 몇 가지는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그 뒤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와서 시력마저 잃었지만 사랑하는 장녀와 함께 마지막 대작인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 Discorsi e dimon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하자 신교국()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스승의 전기를 쓴 V.비비아니와, 기압계()에 그 이름을 남긴 물리학자 토리첼리의 두 제자가 그의 신변에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도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뛰어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강희제[ , 1654.5.4~1722.12.20]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재위 1661∼1722). 이름 현엽(/). 시호 인황제(). 묘호 성조(). 연호 강희.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 ·건륭제()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로 4명의 만주 기인()이 보정대신()이 되어 집정()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을 맡았던 윈난〔〕의 평서왕(西) 오삼계(), 광둥〔〕의 평남왕() 상가희(), 푸젠〔〕의 정남왕() 경계무()와 그 아들 정충()의 삼번왕()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하고, 조운()을 정비하며, 황허강[]의 치수()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 준가르부의 갈단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에서 갈단군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輿)》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1월 14일 병사하였다.

 

건륭제[ , 1711.9.25~1799.2.7]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재위 1735∼95). 이름 홍력(). 시호 순황제(). 묘호 고종(). 옹정제()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이고 황후는 부찰(: 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의 재위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조부 때부터의 재정적 축적을 계승하여 안정되고 문화적으로도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다. 초기에는 민중을 계도하고, 만인(滿) ·한인() 간의 반목을 막고, 붕당의 싸움과 황족의 결당을 금하는 등 내치에 전념하였으며, 만년에는 중가르 평정 2회(1754 ·1757), 위구르 평정(1759), 대금천() 평정(1749), 대 ·소금천() 평정(1776), 타이완(1788) ·미얀마(1778) ·베트남(1789) ·네팔(1790 ·1792) 등의 원정과 평정 등 10회에 걸친 무공을 세워 스스로 십전노인()이라 불렀다. 또 조부 강희제를 본떠 남순() 6회, 동순() 5회, 서순(西) 4회의 내지 순회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외정()과 내순(), 천수연 등의 사치로 막대한 경비를 낭비하여 만년에는 쇠운을 가져왔다. 정치적으로도 그가 총애하던 화신의 전횡과 관리의 독직(), 만주인 ·무관들의 타락 등이 1796년 백련교()의 난 때 표면화되었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1795년 가경제()에게 양위했다. 문화적으로는 그의 개인적 자질이 풍부하여 절정에 달했으며, 예수교 전도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 ·기술이 전래되고, 중국이 유럽에 소개되는 등 국제적 교통이 열렸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가 편집되고 《명사()》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도 활발하였다.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Sergeyevich , 1931.3.2 - ]

  러시아의 정치가·초대 대통령(재임 1990.3~1991.12.25). 카프카스산맥 북쪽의 스타브로폴 지방 프리블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콤바인을 운전하며 5년간 농장일을 하다가 19세 때인 1950년 모스크바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2학년 때인 1952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교내의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약하였다. 5년간의 대학과정을 마치고 1955년 고향 스타브로폴로 돌아와 콤소몰 서기로 일하다가, 1968년 지구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로 취임한 후, L.I.브레주네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농업투자정책을 수행하였다. 1980년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핵심권에 접근, Y.V.안드로포프가 집권하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K.U.체르넨코의 집권기간 중에도 제2인자의 위치를 굳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으로 당서기장에 선출되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하여 소련 국내에서의 개혁과 개방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민주화 개혁 등 세계질서에도 큰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1988년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을 겸하고, 1990년 3월 소련 최초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91년 7월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계급투쟁 포기의 소련공산당 새 강령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은 개혁의지는 1991년 8월 보수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를 유발시켜 한때 실각하였다가 쿠데타의 실패로 3일만에 복권하고, 공산당을 해체, 소련의 공산 통치사에 종막을 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B.M.옐친 등의 주도로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연합이 탄생하자 1991년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4년 씽크탱크인 사회·정치연구소의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91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며, 2001년 11월에는 동아일보사와 인촌기념회의 초청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세계 정세와 한반도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가졌다.

 

고흐[Gogh, Vincent van , 1853.3.30~1890.7.29]

  네덜란드의 화가. 1853년 3월 30일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 모습과 주변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공자[ , BC 552~BC 479]

  중국 고대의 사상가 ·유교의 개조(). 노()나라 창평향(鄕)의 추읍(지금의 의 남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중니(). 이름은 구(). 공자의 ‘자()’는 존칭이다. 【생애】공자는 은()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 이름은 흘()이며 어머니는 안씨() 집안으로, 이름은 징재()이다. 아버지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을 세운 부장()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 ”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공부에 힘썼다.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에게 중용()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년 56세 때 실각하였다.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BC 484년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와, 고제자() 안회() 및 자로()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로 자공() ·증삼()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제자는 모두 3,000명이며, 특히 육예(: · · · · ·)에 통한 문인()이 72명이라고 한다. 그는 ‘’이라고 술회했던 것처럼, 이상을 미래에 건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의 언행은 《논어()》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다.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 《서경()》 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상】공자는 춘추 말기에 주나라의 봉건질서가 쇠퇴하여 사회적 혼란이 심해지자, 주왕조 초의 제도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이다.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 충(),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과 서()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을 중시하고 전승()한 것이 증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영향】공자는 많은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의 실현을 가르치는 한편, 자기자신도 그 수양에 힘써, “종심소욕불유구()”라고 술회할 정도의 인격에 도달했기 때문에, 생전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후에는 제자들이 각지에서 그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나, 제자백가()가 일어남으로써 교세가 약해졌다. 이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맹자()였으며, 또 전국() 말기에 순자()가 이파()의 사상도 받아들여 집대성하였다. 그 후 한()나라의 무제()가 유교를 국교()로 택함에 이르러 공자의 지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사실은 각 시대의 유교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자체는 이 가르침의 비조()로서 청조() 말까지 계속 존경을 받았다. 한국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민국혁명(1912) 후 우위[]와 루쉰[]은 공자를 중국의 봉건적 누습()의 근원이라고 공격하였다. 이 논법은 인민중국에도 계승되어 ‘비림비공()운동’(1973)에서 절정에 이르고 4인조 실각 후 진정되었다.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 1749.8.28~1832.3.22]

  독일의 시인·극작가·정치가·과학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7년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의 숙사(宿)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의 신앙에 접근하였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을 낳게 하였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을 발견하여(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음)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는 끝을 맺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어, l,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 《에그몬트 Egmont》(1787) 등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하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 Torquato Tasso》(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1790)를 발표하였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다.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 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 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 1797년에는 실러의 《시신연감()》에 공동작의 단시() 《쿠세니엔(손님에게 드리는 선물)》 414편을 발표하여 문단을 풍자하였다. 또한 문단의 물의()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를 경작()하여, 1797년은 ‘발라드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1805년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를 맞이하였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과 그 실천이었다. 괴테는 그 무렵에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나아가서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문학적 시야를 넓혔던 것이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 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서, 이 소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1809)을 썼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뒤에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西) West stlicher Divan》(19)이 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거절되었으나, 그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만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1829)과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1833) 등이 있다. 또한 그의 광학()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 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구텐베르크[Gutenberg, Johannes , 1397~1468.2.3]

  독일의 인쇄술 창시자 ·근대 활판인쇄술의 발명자. 마인츠 출생. 1434~1444년경 마인츠를 떠나서 스트라스부르에 있을 때 인쇄술을 발명하기 시작하였다. 마인츠로 돌아와서 1450년경에 금은세공사 J.푸스트와 함께 인쇄공장을 만들어 천문력()이나 면죄부() 등을 인쇄하였다. 2~3년 후에는 기술이 향상되어 《36행 성서》와 《42행 성서》를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구텐베르크 성서》이다. 그 때까지의 인쇄기는 아마포 압축기()와 비슷하였는데, 틀에다 양피지()를 바른 것으로 인쇄지를 고정시키는 개량을 하였다. 활자의 주형()은 주석과 납의 합금이었으며, 그 주조법도 납땜 세공사의 손에 의하여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그러나 1455년 그의 사업은 결국 파산하게 되어 출자자인 푸스트에게 부채의 보상으로 인쇄공장을 양도하였다. 그 후에는 푸스트와 푸스트의 양자 P.쇠퍼가 활자주조기술의 개량을 계속하였다. 후일 구텐베르크는 C.후메리의 원조로 인쇄공장을 재건하였으며, 1460년경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하는 성서를 출판하였다. 그것은 1760년 추기경() 마자랭의 문고()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마자랭 성서》라고도 한다. 마인츠에서 성행하던 인쇄업은 1462년 마인츠시()의 대주교 자리를 노리던 나소왕() 아돌프 2세의 약탈로 파산하였으며, 구텐베르크는 많은 제자들과 함께 편력()의 길에 나섰다. 그 후로 인쇄술은 마인츠로부터 남독일로, 전유럽으로 보급되었으며,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하였다. 후일 그는 아돌프 2세의 초청을 받았으며, 일종의 연금()을 수여받았다.

 

나이팅게일[Nightingale, Florence , 1820~1910]

  영국의 간호사, 병원ㆍ의료 제도의 개혁자. 영국의 부유한 가정의 딸로, 부모가 이탈리아 여행 중 이탈리아 피렌체 출생. 영국과 독일에서 간호사 교육을 받았다. 1844년 이후 의료시설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유럽 ·이집트 등지를 견학, 귀국 후 정규 간호교육을 받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 1854년 크림전쟁의 참상에 관한 보도에 자극되어 34명의 간호사를 데리고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로 가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간호사 직제의 확립과 의료 보급의 집중 관리, 오수 처리 등으로 의료 효율을 일신하여 ‘광명의 천사(The Lady with the Lamp)’로 불렸다. 귀국 후 185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병원개혁안을 건의한 바 있고, 1860년에는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Nightingale Home)를 창설하여 각국의 모범이 되었다. 그후 의료구호제도에 관해 영국 육군을 비롯하여 국내의 각 조직 및 외국 정부로부터의 자문에 응하였다. 저서로 《병원에 관한 노트》 《간호노트》가 있는데,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 국제적십자에서는 ‘나이팅게일상()’을 마련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선발, 표창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의 좌우명으로 유명하다.

 

나폴레옹 1세[1769.8.15~1821.5.5]

  프랑스의 군인 ·황제(재위 1804~1814/1815).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Napoléon Bonaparte)로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출생이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황·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코르시카 방언으로 프랑스어 회화에 고민하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재미로 지냈으나,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프랑스 육군은 3회에 걸친 군대이탈과 2중군적에 대해 휴직을 명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의 무훈을 세웠다. F.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지우()를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다.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 1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기민한 조치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칠음·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구술하는 회상록을, 동행하던 옛 부하 E.라스카스가 기록하였다.

 

넬슨[Nelson, Horatio , 1758.9.29~1805.10.21]

  영국의 해군 제독(). 노퍽 출생. 1770년 해군에 입대하여 1780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프랑스의 혁명전쟁에 종군하여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싸웠다. 1794년에는 코르시카섬 점령에 공을 세웠으나 오른쪽 눈을 잃었으며, 1797년의 세인트 빈센트 해전에서도 수훈을 세웠으나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나폴레옹 대두와 더불어 프랑스 함대와 대결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1798년 나일강 입구의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여 ‘나일강의 남작’이라 불렸다. 러나 나폴리 체재 중 알게 된 해밀턴 부인과의 친교로 일시 군무()를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1801년부터 다시 해상에 나갔고, 같은 해에 자작이 되었으며, 1803년부터는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함대를 견제하였다. 1805년 봉쇄한 풀롱항()에서 탈출한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여, 그 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협에서 프랑스-에스파냐 연합 함대를 포착, 대담한 분단작전으로 이를 격멸시켰으나, 완승 직전에 적의 저격을 받아, “하느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기함 빅토리아호()에서 전사하였다.

 

노벨[Nobel, Alfred Bernhard , 1833.10.21~1896.12.10]

  스웨덴의 발명가, 화학자, 노벨상의 설정자. 스톡홀름 출생.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1850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4년 동안 기계공학을 배웠다. 크림전쟁 후 스웨덴에서 폭약의 제조와 그 응용에 종사하고 있던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폭약의 개량에 몰두하였다. 1863년 니트로글리세린과 흑색 화약을 혼합한 폭약을 발명하고, 그 이듬해 뇌홍()을 기폭제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의 공업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이 희생되었다. 여기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이 바로 액체라는 점에 위험의 원인이 있다고 인정하고, 1867년 이것을 규조토()에 스며들게 하여 안전하게 만든 고형() 폭약을 완성하여 이에 다이너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1887년 니트로글리세린 ·콜로디온면(綿) ·장뇌()의 혼합물을 주체로 하는 혼합 무연화약()을 완성하였다. 노벨의 공장은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서 연이어 건설되어, 1886년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가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 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의 서안에 있는 바쿠의 유전개발에 성공하여 대규모의 정유소를 건설하고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타호(1877년 취항)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파이프라인(1876)을 채용함으로써 노벨가()는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과학의 진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그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가 실시되었다.

 

노자[ , ?~?]

  중국 고대의 철학자, 도가()의 창시자. 성명 이이(). 자 담(). 노담()이라고도 한다. 초()나라 고현(:허난성[] 鹿) 출생.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수장실사(:장서실 관리인)였다. 공자(BC 552~BC 479)가 젊었을 때 뤄양[]으로 노자를 찾아가 예()에 관한 가르침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주나라의 쇠퇴를 한탄하고 은퇴할 것을 결심한 후 서방(西)으로 떠났다. 그 도중 관문지기의 요청으로 상하() 2편의 책을 써 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노자》라고 하며 도덕경()》(2권)이라고도 하는데, 도가사상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전기에는 의문이 많아, 노자의 생존을 공자보다 100년 후로 보는 설이 있는가 하면, 그 실재 자체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 【사상】 노자는 도()의 개념을 철학사상 처음으로 제기하였으며, 이 도는 천지만물뿐만 아니라 상제()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형상과 소리가 없어서 경험할 수도 없고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생성 소멸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가 아니라 유()이다. 천지만물과 달리 도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간섭·지배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그것은 무위()하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가 만약 이러한 무위자연을 본받아 백성들을 간섭 ·지배하지 않고 그들의 자발성에 맡긴다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진다. 노자에 의하면 일체 사물 ·사건들은 그들 자신과 상반하는 대립자들을 지니고 있다. 유()가 있으면 무()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 이들 대립자들은 서로 전화한다. 화는 복이 되고 흥성한 것은 멸망한다. 이러한 대립전화()의 법칙을 알고 유()를 지키면 강()을 이길 수 있다. 이를 귀유()사상이라고 한다. 【전개】 노자사상은 열자()와 장자()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한()나라 초기에 성행하였던 황노()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한고조()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자의 무위자연사상을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동한() 말엽에 도교를 창도한 장도릉()이 노자를 교조()로 추존()하고 노자오천문()을 신도들이 외우고 익혀야 할 경전으로 받들어 노자사상은 도교의 교리가 되었다. 위진시대()에 하안()이 도덕론을 짓고 왕필()이 노자주()를 저술함으로써 노자사상은 위진 현학의 기본사상이 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들어온 불경을 해석하는 데 노자의 용어와 이론이 활용되어 격의()불교 형성에 이바지하였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 이래의 신선사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 도가사상과 결합, 풍류를 숭상하는 기풍을 조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과의()도교가 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산림()을 찾아 신선처럼 살고자 하는 선비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뉴턴[Newton, Isaac , 1642.12.25~1727.3.20]

  영국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근대 이론 과학의 선구자.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 출생. 수학에서의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의 뉴턴역학의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재혼하는 등 불운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1661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 수학자 I.배로의 지도를 받아 케플러의 《굴절광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 월리스의 《무한의 산수》 등을 탐독하였으며, 1664년 학사학위를 얻었다. 1664∼1666년 페스트가 크게 유행하자 대학이 일시 폐쇄되어 뉴턴도 고향으로 돌아와 대부분의 시간을 사색과 실험으로 보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때 싹트게 된 것이라고 하며, 사과의 일화도 이때 있었던 일이다. 1667년 재개된 대학에 돌아와 이 대학의 펠로(특별연구원)가 되고 이듬해에는 메이저펠로(전임특별연구원)가 됨과 동시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1669년 I.배로의 뒤를 이어 루카스교수직에 부임하였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의 최초의 강의도 광학(그 내용은 뉴턴 사후 《광학강의》로 1729년 출판되었다)이었으며, 초기 연구는 광학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광학에 대해서는 이미 울즈소프 시절부터 스스로 수집 ·정비한 실험기구를 이용해 빛의 분산현상을 관찰하였으며, 특히 굴절률과의 관계에 대하여 세밀히 조사하였다. 한편 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이 수차(:도 포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 이 망원경은 천체관측 등에 크게 공헌하여 이 공적으로 1672년 왕립협회회원으로 추천되었다. 그 해에 《빛과 색의 신이론()》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광학》(1704)을 저술했다. 수학에서는 1665년 이항정리()의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 즉 플럭션법을 발견하고, 이것을 구적() 및 접선() 문제에 응용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미적분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1669년에 논문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로 발표하였다. 유분법의 전개에 대해서는 <The method of fluxions and infinite series>에 수록되어 있다. 1676년 그와 동일한 미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와 우선권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그의 사고방식도 실험적 방법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그 중점이 옮겨져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하였다. 뉴턴의 최대 업적은 물론 역학()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의 운동(이것을 지배하는 케플러법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16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 1687년 이 성과를 포함한 대저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되었으며, 이로써 이론물리학의 기초가 쌓이고 뉴턴역학의 체계가 세워졌다. 3부로 된 이 라틴어 저서는 간단한 유율법의 설명에서 시작하여 역학의 원리, 인력의 법칙과 그 응용, 유체()의 문제, 태양행성의 운동에서 조석()의 이론 등에 이르기까지 계통적으로 논술되어 있다. 또 방정식론 등의 대수학() 분야의 여러 업적은 《Arithmetica universalis sive de compositione et resolutione arithmetica liber》(1707)로 간행되었다. 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 한편 신학()에도 관심을 보여 성서의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고대사 해석을 검증하고, 천문학적 고찰을 첨가해 연대기를 작성하였다. 이 성서 연구를 통해 삼위일체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으며, 런던 교외의 켄징턴에서 죽었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고 그 곳에 묻혔다. 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 1844.10.15~1900.8.25]

  독일의 시인·철학자. 레켄 출생.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을 계승하는 ‘생의 철학’의 기수()이며, S.A.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지칭된다. 목사인 아버지를 5세 때 사별하고 어머니·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 집에서 자라났다. 14세 때 프포르타 공립학교에서 엄격한 고전교육을 받고 1864년 20세 때 본대학에 입학하여 F.리츨 밑에서 고전문헌학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 전임하는 스승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이 대학에 있을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고, 또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1869년 리츨의 추천으로 스위스의 바젤대학 고전문헌학의 교수가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지원, 위생병으로 종군했다가 건강을 해치고 바젤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는 평생 편두통과 눈병으로 고생하였다. 28세 때 처녀작 《비극의 탄생》(1872)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 1873~1876년에 간행된 4개의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에 도취한 독일국민과 그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삼았다. 이 이상은 1876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1878∼1880)에서 더욱 명확해져 과거의 이상을 모두 우상()이라 하고 새로운 이상으로의 가치전환을 의도하였다. 이미 고독에 빠지기 시작한 니체는 이 저술로 하여 바그너와도 결별하였고, 1879년 이래 건강의 악화, 특히 시력의 감퇴로 35세에 바젤대학을 퇴직하고, 요양을 위해 주로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남부에 체재하면서 저작에 전념하였다. 《여명()》(1881) 《환희의 지혜》(1882)의 뒤를 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1883∼1885)로 그의 성숙기()가 시작된다. 신의 죽음으로 지상()의 의의를 설파하였고, 영겁회귀()에 의해 삶의 긍정()의 최고 형식을 밝혔으며 초인()의 이상을 가르쳤다. 《선악의 피안()》(1886)에서는 위의 사상에 부연하여 근대를 형성해 온 그리스도교가 삶을 파괴하는 타락의 원인이라 하여 생긍정()의 새로운 가치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1887)에서는 약자()의 도덕에 대하여 삶의 통일을 부여하는 강자()의 도덕 수립을 시도하였으며, 미완의 역작 《권력에의 의지() Wille zur Macht》(1884∼1888)에서는 삶의 원리, 즉 존재의 근본적 본질을 해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1888년 말경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다음해 1월 토리노의 광장에서 졸도하였다. 그 이후 정신착란인 채 바이마르에서 사망하였다. 니체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의 극복이다. 그는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의해 자라온 유럽 문명의 몰락과 니힐리즘의 도래를 예민하게 감득하였다. 사람들은 지고()의 가치나 목표를 잃어 이미 세계의 통일을 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소화()되고 노예화하여 대중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근대의 극복을 위해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피안적()인 것에 대신하여 차안적() ·지상적인 것을, 즉 권력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생을 주장하는 니힐리즘의 철저화에 의해 모든 것의 가치전환을 시도하려 하였다. ‘초인·영겁회귀·군주도덕’ 등의 여러 사상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를 체현()하는 초인이라는 이상을 향하여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리우스 1세[Darius I , BC 558 ?~BC 486]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의 왕(재위 BC 522~BC 486). 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 흔히 다리우스 대왕이라고 한다. 제사() 가우마타는 선왕인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아(스메르디스)를 죽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바르디아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선왕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죽었으므로 그와 동행했던 다리우스가 귀국하여 여러 제후와 함께 제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이를 평정하여 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뒤, 정벌의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BC 518년∼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도 평정하였으며,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도 몰아냈다. 또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번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무장보다는 행정조직가로서 후세에 명성을 남겼다. 광대한 영토를 20(23, 24, 28이라고도 한다)의 행정구인 사트라피(주 또는 방백령)로 구분하고 총독에는 왕이 친히 임명하는 사트라프(방백)를 두어, 지방의 군사와 내정을 관장하게 하여 일정한 공물과 세금을 거둬들였다. 또한 중앙집화의 수단으로서 교통로를 건설하여 군용 및 통상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 역전제()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다. 그리고 파르수아에 페르세폴리스를, 엘람 지방에 수사를 조영()하여 여름과 겨울의 수도로 삼았는데, 규모의 광대함은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윈[Darwin, Charles Robert , 1809.2.12~1882.4.9]

  영국의 생물 학자. 생물진화론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슈루스베리의 의사 로버트 다윈의 아들이며, 에라스머스 다윈의 손자로 태어났다. 1825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배웠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가졌고, 케임브리지대학의 식물학 교수 J.헨슬로와 친교를 맺어 그 분야의 지도를 받았다. 1831년 22세 때 헨슬로의 권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두루 항해 ·탐사하고 1836년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널리 동식물의 상()이나 지질() 등을 조사하여 후에 진화론을 제창하는 데 기초가 되는 자료를 모았다. 특히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 즉 다른 환경의 섬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같은 계통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변이()와의 관련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사상의 심증을 굳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 C.라이앨의 《지질학 원리》도 큰 영향을 주었다. 1839년 《비글호 항해기 Journal of the Voyage of the Beagle》를 출판하여, 여행 중의 관찰기록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지질학상의 문제, 산호초의 생성원인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842년에는 건강 때문에 켄트주()에 은거하여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1856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858년에 동남아시아에서 연구 중이던 A.R.월리스가 다윈과 같은 견해의 논문을 보내오자, 이에 놀란 그는 서둘러 논문을 정리하여 그 해 런던의 린네학회에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동시에 발표했고, 이듬해인 1859년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 in the Struggle for Life》(정식 명칭은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이라는 저작에 진화사상을 공표하였다. 진화론의 골자는 바로 그 저서의 표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자연선택설을 요인론()으로 한 것이다. 자연선택설은 생물의 어떤 종()의 개체 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에,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해 버린다는 견해이다. 곧, 개체 간에서 경쟁이 항상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결과, 진화가 생긴다고 하는 설이다. 이 설에서는 개체간의 변이가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라마르크가 제창한 환경의 영향에 따라 생긴 변이가 다음 대에 유전한다고 하는 획득형질유전론()을 채용하고 있다. 또한, 개체 간에 경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견해는 T.R.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시사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종의 기원》은 초판 1,250부가 발매 당일에 매진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후에 6판까지 출판되었다. 1860년 진화론에 관한 논쟁이 옥스퍼드에서 일어나 T.H.헉슬리와 J.D.후커 등의 지지로 다윈의 견해가 인정을 받았다. 1862∼1881년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진화론에 관한 저작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육동식물()의 변이 The Variation in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1868)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이 유명하다. 특히 후자는 《종의 기원》에서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그의 태도를 분명히 한 저술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진화론 외에도 생물학상의 몇 가지 연구를 하였다. 1880년의 《식물의 운동력》은 식물의 굴성()에 대한 선구적 연구인데, 식물학자인 아들 프랜시스 다윈(1848∼1925)과 공동으로 이룬 것이다. 또한, 《식물의 교배에 관한 연구》(1876)와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토양의 문제》(1881)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1882년 켄트 다운에서 죽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리학에서의 뉴턴 역학과 더불어 사상의 혁신을 가져와 그 후의 자연관 ·세계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테[Dante, Alighieri , 1265~1321]

  이탈리아의 시인. 피렌체 출생. 예언자 또는 신앙인으로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 Divina Commedia》(1307?∼1321)을 남겼고, 이것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단테는 피렌체의 겔프당(:)의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부친은 알리기에로 디 베를린 치오네, 모친은 벨라라고 하였으나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신성로마 황제를 섬겨 십자군에 참가하여 전몰한 피렌체의 기사 카치아귀다라고 《신곡》의 <천국편> 제15가()에서 밝혀 두고 있다. 그가 9세 때에 마치 천사처럼 청순한 베아트리체를 연모하였음이 시집 《신생 Vita Nuova》(1293?)에 나타나 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그의 시의 형성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단테는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피렌체의 석학 B.라티니에게 사사하여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배웠으며 볼로냐대학에서 수사학 ·철학 ·법률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면서 특히 이탈리아어로 시를 지었다. 그 동안에 동급생인 G.카발칸티와 돈독한 우의를 맺어 고전작가로서는 V.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는 한편, 그와 시작()을 경쟁하여 서로 격려하였다. 그는 시칠리아파()와 토스카나의 귀토네파의 서정시에서 받은 영향 아래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싹튼 사랑을 읊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청신체파() 시인으로서의 시작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연정을 카발칸티가 주장하는 청신체(dolce stil nuovo)로써는 표현하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점차 독자적인 청신체의 시를 쓰게 되었다. 1290년 젊음과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요절하자, 단테가 찬미하는 여성의 이상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신생》의 권말에서 성녀 베아트리체를 위해 대작을 준비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신생》은 운문과 산문을 섞은 소품이지만, 그의 거작 《신곡》의 중추가 되는 종교적 ·시적 사상의 싹틈을 엿볼 수 있고, 현실의 여성을 ‘영원한 여성’으로 승화시킨 수법은 당시 유행하던 청신체였다. 이 《신생》 직후 단테의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다. 즉, 문체의 탐구과정에서는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F.호라티우스, N.오비디우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M.T.키케로와 L.세네카에게서는 윤리학을 배웠다. 또한 산타크로체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등의 두 수도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성직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베르투스 마그누스와 T.아퀴나스의 철학 및 신학사상을 배웠다. 그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12세에 피렌체의 도나티가()의 딸 젬마와 약혼하여 1290년 이전에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다. 1287년 볼로냐로 가서 1289년에 기병대의 일원으로 칸바르디노에서 아레초의 기벨린당(:)의 군대와 전투를 하기도 하여 청년시절에는 갖가지 경험을 쌓았다. 1293년의 사회개혁법에 의하여 귀족의 공직금지가 선포되어 조합()의 가입자만이 특례를 인정받게 되자 단테도 ‘의사 및 약종업조합’에 등록하여 12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피렌체 도시국가에 특별참여, 1295년 12월 14일에는 통령()선거를 위한 자문기관의 위원, 1296년 5∼9월까지는 재정을 결정하는 100인위원회 위원, 1300년 5월에는 이웃나라 생 제미냐노의 특파대사를 거쳐, 마침내 통령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흑 ·백() 양당으로 갈라져, 단테는 백당에 소속하여 흑당의 힘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흑당은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였다. 흑당에 동의해서 카를로 바르와의 군대가 피렌체로 입성하여, 단테는 흑당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1302년 1월에는 독직죄로 고소당하여 무거운 벌금과 2년간의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2개월 후에는 영구유형을 선고받고, 시정부()에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신곡》의 첫머리에 있는 “어두운 숲을 헤맨다”는 표현은 단테가 35세 때인 1300년 유랑의 길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양심 ·예지 ·신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그로서는 이 부당한 단죄에 대한 반항은 백당의 잔당에 가담하여 피렌체를 다시 탈환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백당은 1303년과 그 이듬해에도 패배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단테만이 일인일당()으로 남았으며, 유랑의 나그네길은 더욱 고난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낙담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고, 인류 구제의 길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지옥에 가서 인간이 범한 죄의 실체와 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인간사회의 모습을 샅샅이 관찰하여 그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과 영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당의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단테는 1303년 유랑의 길에서 베로나의 스칼라가()의 외교사절이 되기도 하고, 1306년 마라스피나의 식객이 되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1306∼1308년 사이에 단테는 《향연 Convivio》을 썼다. 이것은 서장과 14장으로 되어 14개의 칸초네를 넣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는 3개의 칸초네만을 주석()하여 미완으로 그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신곡》의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연》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스콜라 철학이고, 주로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집 《리메》 또는 《칸초니에레》는 앞에서 든 두 작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단테의 시를 모은 것으로 그 대부분이 청신체로써 베아트리체를 읊었다. 1304∼1307년에 단테는 《속어론():De Vuigari eloquentia》을 썼는데 이것은 라틴어의 논문으로 언어문제와 시작을 다루었으나, 이 작품도 제2권 제14장으로 중단하여 미완으로 끝났다. 1310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기 위하여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왔을 때 이 고행의 시인은 모든 악에서 이탈리아가 풀려날 것으로 믿고 열렬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모든 겔프당()의 도시는 맹렬히 하인리히 7세에게 반항하였고, 1313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단테의 피렌체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에 그는 라틴어로 《제왕론()》(전 3권)을 썼다. 그는 제1권에서 정의와 평화의 확립을 주장하였고, 제2권에서 제국은 각 시민이 선출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고, 이는 신의 가호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3권에서는 교황과 제왕을 분리하여 교황은 정신계를, 제왕은 물질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315년 《피렌체의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는 모욕적 대특사()를 거부하였다. 이 해에 피렌체 정부는 단테 및 그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1318년 이후 라벤나의 영주 G.N.폴렌타는 유랑시인 단테에게 안식할 땅을 제공하여 세 아들은 성직자가 되고, 단테는 《신곡》을 완성하였다. 최대의 걸작 《신곡》은 단테의 문학적 ·종교적 사상의 결정()으로, <지옥편>은 1304∼1308년에, <연옥편>은 1308∼1313년에, <천국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에 완성하였다. 또한 그의 《농경시()》는 친구인 볼로냐대학 교수 G.데르 비르지리오에게 보낸 목가()이다. 1302년 초에는 베로나에 가서 《수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신곡》 <천국편>의 제25장 첫머리에서 그는 피렌체 시민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1321년 9월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죽음으로써 그의 그러한 꿈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폴렌타는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하여 최대의 애도를 표하고, 라벤나의 땅에 묻었다. 그 묘소의 건조는 내란으로 인하여 천연()되다가, 1482년 B.벰보가 조각가 P.롬바르도에게 명하여 완성시켰다.

 

달마[ , Bodhidharma , ?~528 ?]

  중국 남북조시대의 선승(). 중국 선종()의 창시자. 범어()로는 보디다르마이며 보리달마()로 음사()하는데, 달마는 그 약칭이다.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후에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에 통달하였다.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북위()의 뤄양[]에 이르러 동쪽의 쑹산[]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하고 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을 제자 혜가()에게 전수하였다. 그의 전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최근 둔황[]에서 출토된 자료에 따르면, 그의 근본사상인 ‘이입사행()’을 설교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오늘날의 학계의 정설로는, 달마는 《사권능가경()》을 중시하고 이입()과 사행()의 가르침을 설파하여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불교()와는 정반대인 좌선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를 강조한 사람이다.

 

데카르트[1596.3.31~1650.2.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투렌라에 출생. 근세사상의 기본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세계를 몰가치적()·합리적으로 보는 태도(과학적 자연관)를 정신의 내면성의 강조(정신의 형이상학)와 연결지워 이를 이원론()이라고 하였다. 이원론은 동시에 근세사상 전체에 통하는 이원성의 표현이다. 프랑스 중부의 관료귀족 집안 출신으로 생후 1년 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 때 예수회의 라 플레슈학원에 입학,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6년 푸아티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에서 배운 스콜라적 학문에 불만, 세상을 통해 배울 것을 결심하고 여행에 나섰다. 1618년에는 지원장교로서 네덜란드군에 입대했다. 수학자 베이크만과 알게 되어, 물리수학적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편수학()’의 구상에 이르렀다. 1620년 군대를 떠나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1625년부터 파리에 체재,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하였다. 1629년 이후에는 네덜란드에 은거하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형이상학 논문 집필에 종사하였으나, 같은해 3월 제자로부터 환일() 현상의 해명을 요청받고 중도에 자연연구로 전향, 결국 자연학()을 포괄하는 《우주론》의 구상으로 발전하였다.그러나 이 논문의 완성단계에 G.갈릴레이의 단죄사실()을 듣고, 지동설을 주내용으로 한 이 책의 간행을 단념, 그 대신 1637년 《방법서설()》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1641년 형이상학의 주저 《성찰록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4년에는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를 출간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데카르트 사상의 혁신성이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 ‘자유로운 나라’였던 네덜란드도 캘빈파() 신학자들의 박해로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 무렵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649년 가을 스톡홀름으로 가서 지내던 중 폐렴에 걸려 생애를 마쳤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는 기하학에 대수적 해법을 적용한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물체에는 무게라는 실재적 성질이 있기 때문에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하는 스콜라적 자연학에 만족하지 못하고, 물리 수학적 연구를 통하여 물질, 즉 연장()이라는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이끌려 갔다. 그의 형이상학적 사색은 이른바 방법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즉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근본원리가 《방법서설》에서 확립되어, 이 확실성에서 세계에 관한 모든 인식이 유도된다. 의심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무한히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결과할 리가 없다는 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되고, 신의 성실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물체의 존재도 증명된다. 더욱이 정신은 사고하는 것만으로, 다시 말하면 신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심신의 실재적 구별도 확정된다. 이리하여 정신과 물체가 서로 독립된 실체로 세워지고 이 물심이원론에 의해 기계론적 자연관의 입장의 기초가 마련된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심신결합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덕의 문제를 풀 수 없기 때문에, 이 물심분리와 심신결합의 모순 조정에 데카르트 이후 형이상학의 주요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 1821.11.11~1881.2.9]

  러시아의 소설가. 모스크바 출생.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시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 점이 바로 러시아 도시문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굳히게 하는 한편, 훗날의 토양주의(:러시아 메시아니즘)의 주장에서 엿보이는 바와 같은 농민이상화의 경향마저 그에게서 싹트게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좋아하여, 특히 W.스콧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다음에는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싫증을 느껴 1년 남짓 있다가 퇴직했는데, 때마침 번역 출간된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가 호평을 받은 데 힘을 얻어, 직업작가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으로서,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을 기치로 하였던 당시 비평계의 거물인 V.G.벨린스키에게 인정되어, 24세의 무명작가는 일약 ‘새로운 고골리’라는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곧 이어 발표한《분신()》(1846)과 《주부》(1847) 등은 벨린스키로부터 심리주의로의 병적인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어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 무렵부터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백야()》(1848) 《네트치카 네즈바노바》(1849) 등의 가작을 씀으로써, 인간의 정열의 여러 모습을 탐구하는 한편, F.M.C.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M.V.페트라셰프스키의 서클로 접근해 갔다. 이 시기의 혁명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창작활동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된다.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을 하게 되는 시기였다. 출옥 후 5년간, 중앙아시아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는 동안 M.이사에바와 결혼하고,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이 허락되었다. 귀환 후 농노해방을 눈앞에 두고 고조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형인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시사문제를 집필하는 한편,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과, 그의 전기()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으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하였다. 그 다음의 수년간은 농노해방 뒤에 야기된 정치적 반동과 사회적 환멸의 한 시대로서, 또한 그의 개인생활에도 중대한 사건이 겹친 시기였다. 즉, 1862년의 그의 첫 서유럽 여행, 애인 스슬로바와의 이상한 연애체험, 1864년의 그의 아내와 형의 죽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의 문학상의 전기()가 되었으며, 후기의 대작들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일반에게 인정되는 중편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864년 잡지 《에포하》를 발행했으나 완전히 실패하여 그는 거액의 빚만 짊어지게 되어 생활이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1867년 중편 《노름꾼》(1866)의 구술()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된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와 재혼한 뒤로는, 빚쟁이의 추궁을 피해 4년이나 해외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이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남기게 되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1∼1872) 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1870) 등을 발표했다.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만년의 10년간은 장편 《미성년》(1875)과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79∼1880) 이외에도, 1873년 이후 시사적 수상()과 문예평론 ·단편 등을 포함한 자유형식의 문집 《작가의 일기》를 썼다. 그가 죽기 반 년쯤 전 푸슈킨의 동상제막식에서 행한 기념강연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불우했던 그의 만년을 장식해 주었다.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시대의 첨단적인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에 그의 특색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에 있어서의 인간을 추구한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묘사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생태를 다룬 《미성년》, 존속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가 다르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양극적()인 인물상()인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기 《백치》의 미슈킨 공작, 《악령》의 스타브로긴으로 계승되며, 나아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결로 발전하는 것 등이 한 예로서, 그의 작품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극을 작가 자신과 더불어 체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상극의 생생함을 ‘폴리포닉한 로망’ 형식 속에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과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지만, 특히 현저한 것으로는 F.W.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사상의 계보를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온갖 적극성을 부정하는 수난의 철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반동작가로 규정하여 왔으나, 근자에 이런 견해는 다소 약화되어 그의 저작집 등도 새로 출판이 허용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1980년 도스토예프스키전집(전7권)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 1536~1598.8.18]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와리국[:]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 간파쿠[]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웅지()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西]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도연명[ , 365~427]

  중국 동진() ·송대()의 시인. 자() 연명 또는 원량(). 이름 잠(). 문 앞에 버드나무 5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장시성[西] 주장현[]의 남서 시상() 출생. 그의 증조부는 서진(西)의 명장 도간()이며, 외조부는 당시의 명사 맹가()였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이 그렇게 풍족하지 못한 소지주 정도의 가정에서 자랐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의 제주()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군벌항쟁의 세파에 밀리면서 생활을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진군참군() ·건위참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펑쩌현[]의 현령()을 사임한 후 재차 관계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의 퇴관성명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유명한 《귀거래사()》이다. 사전()에는 상관의 순시 때에 출영()을 거절하고, “나는 5두미()를 위하여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라고 개탄하였다고 적혀 있다. 향리의 전원에 퇴거하여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하여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그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4언체() 9편과 그때에 유행하던 5언체() 47편이 전해지고 있지만, 기교를 그다지 부리지 않고, 평담()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는 평생의 거의 대부분을 민간인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활로부터 스며나온 마음의 부르짖음이었으며, 당시 유행하던 귀족적 생활에서 풍겨나온 여유 있는 유희문학()이 아니라 민간생활 그 자체를 노래한 문학이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따스한 인간미가 있으며, 고담()의 풍이 서려 있다. 형식면으로는 대구적 기교()나 전거() 있는 표현은 별로 쓰지 않았으므로, 같은 시대 시인인 사영운()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양()나라의 종영()의 《시품()》에서는 “고금 은일시인()의 종()”이라 평가하였으며, 후세에도 똑같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당대()의 맹호연() ·왕유() ·저광희() ·위응물() ·유종원()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문학사상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 그리고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문선()》에다 9 편을 수록하여 전집을 편집하였다. 이후 판본() 및 주석서가 나왔다. 시 외에 《오류선생전()》 《도화원기()》 등 산문에도 뛰어났으며, 또 지괴소설집() 《수신후기()》의 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두보[ , 712~770]

  중국 성당시대()의 시인. 자 자미(). 호 소릉().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과 병칭하여 이두()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의 샹양[]이지만, 허난성[]의 궁현[]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의 위인 두예()이고, 조부는 초당기()의 시인 두심언()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祿)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의 행재소()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의 친저우[] ·퉁구[]를 거쳐 쓰촨성[]의 청두[]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의 쯔저우[] ·랑저우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의 막료()로서 공부원외랑()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의 쿠이저우[]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라 불린다. 단시정형()의 금체()는 특히 율체()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 ·초당()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으로 조술()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의 한유() ·백거이()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의 왕안석() ·소식()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 《추흥()》 《삼리삼별()》 《병거행()》 《여인행()》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 왕수()의 《두공부집()》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의 《구가집주()》는 훈고(뭍)에 뛰어났으며, 청()의 전겸익()의 《두시전주()》는 사실()에 상세하며, 구조오()의 《두시상주()》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 ·이색()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 황학() 보주()의 《두공부시보유()》 등이 복간()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 때는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 《분류두공부시언해(:)》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 26권은 두시()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의 《두시언해비주()》(1958), 양상경()의 《두시선()》(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드골[1890.11.22~1970.11.9]

  프랑스의 군인·정치가. 릴 출생.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생시르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여 중상을 입고 독일군에 포로가 된 적도 있다. 1922년 모교의 교관, 이어서 원수 H.P.페탱의 부관으로 근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으로 있었고,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항전을 주장, 자유프랑스위원회를 조직하여 페탱이 이끄는 비시(Vichy)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43년 알제리에서 결성된 국민해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대독()항쟁을 계속하였다. 1944년 파리에 귀환, 임시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1945∼1946년 총리 ·국방장관, 1947년 프랑스국민연합(RPF)을 조직, 1951년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1953년 RPF를 해체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1958년 알제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제4공화정이 붕괴될 위기에 몰리자 다시 정계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그 해 6월 총리가 되었고, 9월 28일 헌법개정 국민투표에 의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킨 제5공화정을 발족시켰고, 10월 그를 지지하는 신공화국연합(UNR)을 결성, 11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고, 5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1년 1월 알제리민족자결정책, 1962년 4월 알제리의 독립을 국민투표로 가결하여 7년이 넘는 알제리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프랑스 경제의 가장 큰 장애를 제거하였다. 1962년 10월 대통령 직선을 국민투표에 붙여 승리를 거두어 드골체제를 일단 완성시켰다. 그 후 1963년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가맹에 거부권을 발동하였고, 독자적인 핵무장, 미국지휘하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를 부흥하기 위하여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1965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위기’로 10년에 걸친 드골체제의 기반이 흔들려 6월 총선거에서는 드골파가 승리하였으나, 1969년 4월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저서 《칼날》(1932) 등의 군사이론서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회고록》(3권, 1954∼1959)이 있고, 은퇴 후에 쓴 그 속편인 《자서전》이 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 1483.4.6~1520.4.6]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우르비노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동향인인 T.비테에게서 배웠다. 1500년 P.페루지노가 완성한 페루지아 어음교환소의 벽화 중 우의상()은 당시 17세였던 라파엘로가 조수로서 그린 것이다. 1500년경의 작품으로 알려진 콘데미술관(샹티유이)의 《삼미신()》, 내셔널갤러리(런던)의 《기사의 꿈》은 청순한 색채와 감미로운 음악적 리듬이 보이며 격정이나 위대성을 강조하지 않고 부드러운 매력을 나타내려 하였다. 공간에 교차하는 화음의 물결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음악적인 감각은 루브르미술관의 《성 미카엘》 《성 게오르기우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조를 이룬다. 페루지아에 나온 후로는 페루지노풍의 최고의 기법을 급속히 익혔으며, 특히 《성모대관》(바티칸미술관) 《그리스도의 책형》(런던) 《스포잘리치오(성모의 결혼)》(밀라노) 등은 페루지노 작품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공간처리나 환상적인 표현에는 그의 스승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미를 보이고 있다. 1504년 피렌체에서 예술적 전통에 고취되면서 F.바르톨로메오의 장대한 화면구성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암법을 배워 페루지노의 영향을 탈피하고 피렌체파()의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도니 부처상()》이나 기타 이 시기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고, 이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성모자상에서도 성모의 자태나 피라미드형 구도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이 뚜렷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매장》(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선의 움직임까지도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인()의 기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화면구성에 있어서 선의 율동적인 조화라든지 인물 태도의 고요함이나 용모의 청순함 등에는 언제나 독자성을 나타내었다. 1509년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서명실()의 장식에 종사하여 천장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면에 《성체의 논의》 《아테네의 학당》 《파르나소스》 《삼덕상()》 등을 그렸다. 로마의 고대유적과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완성단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성당 천장화에서 조형적 파악법을 배워 공교한 율동적 구도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격조 높은 걸작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무렵 교황 측근으로부터도 계속 제작의뢰를 받아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소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파르네지나궁전의 벽화 《갈라테아의 승리》의 제작의뢰를 받은 것도 역시 이 무렵이다. 그때 파르네지나궁에서 작업 중이던 베네치아파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온보와 알게 되어 그의 채화법()을 배웠다. 이 색채묘법()의 변화는 1511∼1514년에 제작한 바티칸궁전의 스탄차 데 엘리오도로의 벽화 《헬리오도로스의 추방》 《볼세나의 미사》 《성 베드로의 해방》 《로마에서 격퇴당하는 아틸라》 등에 나타나 있는데, 빛과 그늘을 양괴적()으로 대치시킨 명암효과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띠었다. 베네치아파적인 색채효과는 《율리우스 2세상()》을 위시하여 《베일을 쓴 여인》 《발타사르 카스티요네상》 《작은 의자의 성모》 등에 나타나 있다. 한편 건축에도 손을 대어 1514년 동향 선배인 B.L.브라만테의 뒤를 이어 성베드로대성당 건조에 관계하였고, 1514∼1517년 바티칸궁전의 스탄차델 인첸디오의 벽화장식에도 종사하였으며, 1515년부터는 고대유적 발굴의 감독관이 되었다. 《산시스토의 성모》(드레스덴)는 이 무렵의 걸작으로 아카데믹한 형식주의가 싹트고 있으며 《산타 체칠리아》(볼로냐)에서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그 사이에도 키지예배당의 설계와 장식, 바티칸궁전의 로지에의 장식, 빌라마다마의 건축 등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화려한 궁정화가로서 일에 쫓기던 그의 예술은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차차 쇠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그린 파르네지나궁의 천장화 《프시케의 이야기》에서는 지난날의 감미로운 리듬은 사라지고 고대 조각의 영향을 조악하게 반영하여 채색한 조상()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1518년의 《레오 10세의 초상》에서는 군상()을 훌륭한 솜씨로 처리하여 뛰어난 초상화가임을 증명하였다. 만년에 명예회복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그리스도의 변용》(바티칸)을 완성하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소란을 대조시켜 S자형의 분방한 구도로 동적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은 이미 고전양식을 해체한 것으로 바로크양식의 싹이 엿보인다. 짧은 생애에 많은 걸작을 남긴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19세기 전반까지 고전적 규범으로 받들어졌다. 그 후 근대회화사조에 의하여 경시된 적도 있다.

 

레닌[1870.4.22~1924.1.21]

  러시아의 혁명가·정치가.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로 귀국하였다.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 1452.4.15~1519.5.2]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근교의 빈치에서 출생하였다. 공증인 세르 피에르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 카테리나다.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다. 이곳에서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동굴의 성모〉 〈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로댕[1840.11.12~1917.11.17]

  프랑스의 조각가. 정식 명칭은 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년 11월 12일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였다. 1861년에는 아버지가 퇴직하였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부업을 하면서 야간 제작에 몰두하였다. 1862년 누이의 사망에 충격받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에마르 신부의 설득으로 작업장에 돌아왔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 시기부터 생활을 위한 건축 장식업에 종사하다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가한 후 제대하여 벨기에의 브뤼셀로 떠났다. 이곳에서 약 7년간 건축장식 직공으로 일하면서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특히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로댕의 그 후 예술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 체재 중 제작한 《청동시대()》를 출품하였다. 이것은 그 작품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으로 인하여,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청동시대》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그의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이었다. 1880년에 이 작품은 재인식되어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국가에서 매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로댕은 미술국 차관 체르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받았다. 그의 조각은 이때부터 《청동시대》의 사실적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내면적인 깊이가 가미된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장식미술관을 위한 대작의 모티프를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얻은 영감에 두고 거작 《지옥의 문》(1880∼1900)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상 속에서 그의 명성의 중핵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 즉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1884) 《발자크상()》(1898) 등을 통해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망 후 그의 주거 및 전재산은 만년의 작업장이었던 파리의 호텔 비롱에 그의 미술관을 개설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증되었다. 1916년 국립로댕미술관이 발족되어 조각의 대표작은 물론 데생·수채화 등도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에도 로댕미술관이 부설되어 있다. 로댕의 작품 가운데 《세 그림자》 《이브 흉상》 《영원한 청춘》 등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베스피에르[1758.5.6~1794.7.28]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 출생. 아버지는 변호사였는데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행방을 감추었다. 불행한 소년시절을 겪은 뒤, 파리의 루이르그랑학원에서 법률을 배우고 1781년 아라스에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다. 1789년 삼부회() 의원에 당선되고, 혁명이 일어나자 자코뱅당()에 가입하였다. 의회에서는 소수 민주파에 속해 있었으며 국왕의 거부권에 반대하였다. 1791년 왕 일가가 바렌으로 도망친 것을 계기로 입헌왕정파가 자코뱅당에서 탈퇴하였을 때, 자코뱅당에 남아 그 재건에 힘써 사실상의 당 지도자가 되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일어나려 할 때, 재야()의 몸으로 반대성명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정폐지의 계기가 된 1792년 8월 10일 봉기 후에 급진적인 사건 처리안을 기초하여, 파리코뮌으로부터도 대표로 추대되었다. 그 해 9월 국민공회(혁명의회)에는 파리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당통 및 마라와 더불어 산악파() 거두로 일컬어졌다. 1793년 6월 2일 산악파가 독재체제를 완성한 후로는 농촌의 봉건제도 불식, 소농민과 소생산자층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의 실현을 서둘러, 공안위원회에 가입하여 공포정치를 추진하였고, 1794년 3월 자코뱅당 좌파인 에베르파()를 반란죄의 명목으로 숙청하였다. 이어 4월 우파인 당통파()를 일소하여 독재체제를 완성하였으나, 7월 27일 부르주아 공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의원들의 반격을 받고, 28일 생쥐스트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는 청렴결백하였으나 그 반면 남에게는 냉담한 인상을 주었다. 일생동안 독신으로 정치에만 열중하여, 루소를 숭배하고, 소()부르주아적 혁신을 수행하려다 중도에서 쓰러졌다.

 

로크[Locke, John , 1632.8.29~1704.10.28]

  영국의 철학자 ·정치사상가. 브리스틀 근교의 링턴 출생. 계몽철학 및 경험론철학의 원조로 일컬어진다. 아버지는 소지주 ·법률가로서 내란 때는 의회군에 참가하여 왕당군과 싸웠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배웠고, 한때 공사(使)의 비서관이 되어 독일 체류 중에 애슐리경(뒤의 샤프츠베리 백작)을 알게 되어 그의 시의() 및 아들의 교사 그리고 고문이 되었다. 백작이 실각되자 반역죄로 몰려, 1683년 네덜란드로 망명했다가, 1689년 사면되어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동안 각지를 전전하면서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귀국 후 《종교 관용에 관한 서한》(1689) 《제2서한》(1690) 《제3서한》(1692) 《통치이론》(1690) 《인간오성론()》(1690)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관직에 있었으나 1700년 이후 은퇴하여 에식스의 오츠에서 사망하였다. 데카르트 철학과 I.뉴턴에 의해 완성된 당시의 자연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반()스콜라적이었다. 《인간오성론》은 그의 영향을 바탕으로 G.버클리, D.흄에게로 계승되었던 경험론과 내재적 현상론()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되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제기하여 논술한 저서이다. 제1권에서는, 먼저 R.데카르트나 케임브리지 플라톤파()의 본유관념()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제2권에서는, 인지()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는 그 배후에 상정되는 불가지()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 ·향() ·음()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 ·운동 ·고체성()과 같이 물() 자체에 구비된 제1성질과 구별하여, 전자()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 놓았다. 제3권의 언어론은, 스콜라적 실체형상()의 비판, 개념론 또는 유명론적()인 보편개념의 설명 ·정의에 대해서의 견해 등 현대 의미론()에 통하는 중요한 고찰을 포함시켰다. 제4권은 제3권까지 논술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지식의 확실성 ·가능성 ·종류 등을 논했다. 제4권에서 자아의 직각지()를 지식의 근원으로 하는 것 등 이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나, 지식을 관념과 대상 간이 아니라 관념간의 일치 또는 불일치의 지각()이라는, 관념간의 관계라고 한 것은 후의 경험론의 방향을 보인 것이다. 그에게는 《인간오성론》에서 단편적으로 취급된 이외에는 정리된 윤리서()는 없다. 그러나 도덕의 심리적 해명 방법이나 쾌락주의 ·행복주의의 경향과, 도덕을 신()의 법, 자연법, 국법과의 일치에서 구하려고 한 방향 등은 영국 고유의 윤리와 공통된 성격을 보인다. 또, 계시()의 뜻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적 논증()의 한계를 넘는 것을 개연적()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종교상 이신론()을 조장하는 입장에 섰다. 법 ·정치 사상에서는 계약설을 취하지만, 홉스의 전제주의()를 자연상태보다도 더 나쁘다고 생각하여 주권재민()과 국민의 반항권을 인정하여 대표제에 의한 민주주의, 3권분립, 이성적인 법에 따른 통치와 개인의 자유 ·인권과의 양립 등을 강조하여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예혁명을 대변하고 프랑스혁명이나 아메리카 독립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서유럽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또 교육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의 교육법을 통렬히 비판하여 그리스 ·라틴어 집중주의, 암기식 주입주의를 반대하고 수학적 추리와 유용한 실제적 지식, 신체 ·덕성의 단련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 사람의 소질을 본성에 따라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여 가정교사에 의한 교육을 주장했다. 저서로 《금리저하와 화폐가치와 화폐가치 앙등의 결과에 관한 고찰》(1691) 《교육론》(1693) 등이 있다.

 

뢴트겐[1845.3.27~1923.2.10]

  독일의 물리 학자. 프로이센의 레네프 출생. 어릴 때는 네덜란드에서 보냈고, 위트레흐트공업학교를 거쳐 한때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배웠으며, 취리히공과대학에 입학, 수학과 화학을 전공하였다. 1869년 졸업 후 A.쿤트의 조수가 되어 1872년 그를 따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옮겼다가 1874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 강사, 1875년 호켄하임농과대학교 수학·물리학 교수, 1876년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 초청교수, 1879년 기센대학교 물리학 교수·물리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1888년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돌아왔다가 1900년 뮌헨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초기에는 기체의 비열(), 결정의 열전도() 등을 연구하였고, 이어서 석영()의 전자기적 성질, 여러 가지 액체의 굴절률에 대한 압력의 영향, 전자기장에 의한 편광면()의 변이()의 문제, 액체의 압축률, 물에서 기름방울이 퍼지는 문제 등을 다루었으며, 1880년 전자기장 내에서 운동하는 유전체()에 생기는 전류(뢴트겐전류)를 발견하였다. 뷔르츠부르크대학교로 옮길 무렵부터 음극선() 연구에 착수하여, 1895년 검은 종이로 완전히 싼 크룩스관()으로 음극선 실험을 했을 때 우연히 그 근처에 있던 시안화백금바륨을 칠한 널빤지가 형광을 내는 사실을 관찰하여, 이 형광이 발생하는 원인이 방전관()에 있음을 밝혀냈고, 여러 가지 물체에 대하여 기존의 광선보다 훨씬 큰 투과력을 가진 방사선(:복사선)의 존재를 확인, 이를 다른 방사와 구별하기 위해 ‘X선’이라 명명하였다. 이 업적으로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루소[Rousseau, Jean-Jacques , 1712.6.28~1778.7.2]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17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1755), 《정치 경제론》(1755), 《언어기원론》(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17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17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17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17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 ·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을 집필하였다. 1768년 17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17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elano , 1882.1.30~1945.4.12]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재임 1933∼1945). 뉴욕주() 하이드파크 출생.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190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며, 1907년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10년 뉴욕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T.W.윌슨의 대통령선거를 지원해주고, 1913∼1919년 윌슨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어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활약하였고, 베르사유회의에 수행하였다. 1920년 민주당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후보인 J.M.콕스와 함께 국제연맹 지지를 내걸고 싸웠으나,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W.G.하딩에게 패하였다. 그 후 다시 변호사로 일하며 보험회사에도 관계하였으나, 1921년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치료 후 체력이 회복되자 1924년 정계로 복귀하였다.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2기()를 재임하였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자, 그 지명수락연설에서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후버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화금융제도의 재건과 통제, 산업 특히 상공업의 통제, 농업의 구제와 통제, 구제사업과 공공사업의 촉진, 정부재정의 절약 및 행정의 과감한 개혁 등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외교면에서는 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미국만의 정책으로 삼지 않고 아메리카주() 전체의 외교정책으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0년 3선되었다. 1935년 유럽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중립법이 제정되었지만, 원래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고립주의를 억제하여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후에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원조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카이로·테헤란·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루이 14세[Louis XIV , 1638.9.5~1715.9.1]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때는 30년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으므로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 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에 죽자, 왕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부의 임시적인 특사의 성격을 띤 앵탕당(지사)의 직무를 확대하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관료의 조직망을 전국에 폈다. 또 파리고등법원의 칙령심사권을 박탈하여 법원을 단순한 최고재판소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왕은 흡사 ‘살아 있는 법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할 만큼 절대주의시대의 대표적 전제군주가 되었다. 왕은 마자랭 재상 때의 재무총감을 독직과 관련하여 단죄하고 J.B.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기용한 것이 그의 치정을 빛나게 하였는데, 콜베르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보호관세에 의한 무역의 균형을 꾀하는 외에 산업을 육성하고 식민지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콜베르 외에도 많은 명장과 현신()이 배출되었는데, 왕은 이들의 재능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유럽의 열강을 상대로 플랑드르전쟁(1667∼1668) ·네덜란드전쟁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팔츠계승전쟁) ·에스파냐계승전쟁을 강행하였다. 왕은 이 전쟁으로 유럽의 지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파리 교외에 지은 베르사유궁전은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왕의 치세 중에 P.코르네유, J.B.라신, 몰리에르 등의 거장이 나와 고전주의 문학을 꽃피웠고, 이때 프랑스어가 우아하게 세련되었다. 중앙집권체체를 완성한 후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 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고,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를 표방, 1685년에는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으며, 장세니스트를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여, 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루터[Luther, Martin ,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링컨[Lincoln, Abraham , 1809.2.12~1865.4.15]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재임 1861~1865). 켄터키주() 호젠빌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지만, 독학하여 1837년 변호사가 되어 스프링필드에서 개업하였으며, 1834~1841년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47년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미국멕시코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인기가 떨어져 하원의원직은 1기로 끝나고 변호사 생활로 돌아갔다. 1850년대를 통하여 노예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크게 고조되자 정계로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1856년 노예반대를 표방하여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그해 대통령선거전의 공화당후보 플레먼트를 응원함으로써 자신의 웅변이 알려지게 되었다. 1858년 일리노이주() 선출의 상원의원선거에 입후보하여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의 S.A.더글러스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더글러스와의 공개논전에서 행한 “갈려서 싸운 집은 설 수가 없다. 나는 이 정부가 반은 노예, 반은 자유의 상태에서 영구히 계속될 수는 없다고 믿는다” 는 유명한 말을 하여 더글러스의 인민주권론을 비판하였다. 선거결과에서는 패하였으나, 7회에 걸친 공개토론으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고,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것은 노예제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과히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 쪽에서 노예제 유지의 브리켄리지와 인민주권의 더글러스의 두 명의 후보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의 당선과 함께 남부 제주()는 잇달아 합중국을 이탈하여 남부연합국을 결성하였다. 링컨은 이미 노예제를 가지고 있는 남부 제주의 노예를 즉시 무조건 해방시킬 생각은 없었으나, 앞으로 만들어질 준주()나 주()는 자유주의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1861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하자 링컨은 “나의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하였으나,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남군의 공격으로 마침내 동족상잔()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중 그는 의회에 대하여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청하고, 독재적 권한을 행사하여 인신보호령장의 정지, 언론집회의 자유의 제한을 강행, 반대당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여러 세력을 조정하여, 북부의 강경론자들을 누르면서 노예해방을 점진적으로 단행하는 것이었다. 전황은 처음에는 북군에게 불리하였으나, 1862년 9월 남군이 수세로 몰린 때를 노려 노예제 폐지를 예고하고 외국의 남부연합국 승인을 저지함으로써, 북부와 해외여론을 자기편으로 유도하여 전황을 일거에 유리하게 전개하는 데 성공하였다. 1863년 11월 게티즈버그국립묘지 설립 기념식 연설에서 유명한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말을 남겼다. 전쟁 중인 1864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재선 전망이 불투명하였으나, U.S.그랜트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승리가 계속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사령관 R.E.리가 애포매턱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은 종막을 고하였다. 전쟁이 종막에 가까워짐에 따라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조기 연방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극장에서 연극관람 중 남부인 배우 J.부스에게 피격, 이튿날 아침 사망하였다.

 

마르코 폴로[Polo, Marco , 1254~1324.1.8]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상인, 여행가. 달마티아 쿠르촐라 출생. 1271년 보석상인인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숙부인 마테오 폴로를 따라 동방여행을 떠났다. 소()아시아의 시바스에서 모술을 거쳐 이라크로 들어가,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원나라)으로 갈 예정으로 바그다드에서 바스라로 갔다. 그러나 해로를 이용할 것을 단념하고 육로를 택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키르만 타브리즈 ·발흐 ·파미르 고원을 경유하여 타림 분지()에 이르렀고,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체르첸 등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변두리의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지나 하서(西) 지방에 도달하여 간저우[]에서 l년간 체재한 다음,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이 있는 상도(:현 네이멍구자치구의 남부인 돌룬노르)에 도착하여(1274) 쿠빌라이를 알현하였다. 마르코는 그대로 중국에 머물러 원나라에서 우대를 받아 관직에 올랐다. 그 사이 중국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17년간 원나라에서 살았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이란의 몽골왕조인 일 한국()의 아르군 칸에게 강가()하는 원나라의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되어 겨우 원나라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행은 푸젠성[]의 취안저우[]를 출범()하여 자바 ·말레이 ·스리랑카 ·말라바르 등을 경유하여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였지만, 아르군 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공주를 그의 아우인 가이하투 칸에게 맡겨놓고, 1295년에야 겨우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는 그 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전쟁에 말려들어 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옥중에서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에게 동방에서 보고 들은 것을 필록()시켰다. 이것이 바로 현존하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세계 경이()의 서(통칭 )》의 원조본()이 되었다. 이 책은 13,4세기의 이란 ·중앙아시아 ·몽골의 역사와 지지() 및 민속 등에 관한 귀중한 문헌이며, 프랑스어()의 원본은 산일()되고, 가장 잘 알려진 이탈리아어() 사본은 1309년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Marx, Karl Heinrich , 1818.5.5~1883.3.14]

  독일의 공산주의자. 혁명가. 경제학자. 라인주()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마오 쩌둥[(모택동) , 1893.12.26~1976.9.9]

  중국의 정치가·공산주의 이론가. 자 룬즈[]. 후난성[] 샹탄현[] 사오산[] 출생.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우며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의 샹샹[]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 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 ·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와 결혼하였고, 그 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 뒤 농홍군()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西] 루이진[]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西] 옌안[]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西)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 쭌이[]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1938) 《신단계론()》(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마젤란[Magellan, Ferdinand , 1480~1521.4.27]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항해의 지휘자이다. 포르투갈의 하급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5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포르투갈왕의 중신 중 한 사람이었으나, 모로코에서 현지 무어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포르투갈과의 인연을 끊고 에스파냐로 갔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를 얻어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때에 침몰 ·도망한 함대는 각각 1척,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것으로 예상하고 서진(西)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세부섬의 왕 및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며, 27일에는 준비가 덜 된 채 막탄섬의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제도의 경선()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1월 몰루카제도의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키아벨리[1469.5.3~1527.6.21]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정치이론가. 피렌체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년부터 피렌체의 제2서기관장직()으로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대사로도 활약하였다. 1512년 메디치가()가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한때 음모의 죄명으로 체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실의 속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주요저서로 《군주론 Il principe》(1532)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1531) 《전술론() Libro dell’arte della guerra》(1521) 《피렌체사 Istorie Florentine》(1532)가 있으며, 또한 이탈리아 연극사상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만드라골라 Mandragola》(1524) 등이 있다. 특히 《군주론》은 그의 대표작으로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책은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 대항하여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 저서는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마호메트[Mahomet , 570?~632.6.8]

  고대 아라비아의 예언자(nabi) ·이슬람교()의 창시자.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보통 '라술라', 즉 ‘알라의 사도’라고 부른다. 중년() 이전 그의 경력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코끼리의 해’에 출생하였다는 전승()이 있으며, 570년경 아비시니아군()이 코끼리의 대군()을 이끌고 남()아라비아로 침입해 왔으므로 이 무렵에 출생하였다고 생각된다. 마호메트의 하심 가문()은 메카의 명문인 쿠라이시 부족()의 일원이었지만, 아브두 샴스 가문(후의 우마야 가문)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부친 압둘라가 일찍 죽었으므로, 마호메트는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조부의 사망 후로는 숙부 아브 탈리브의 보호를 받았다. 청년시절 그는 대상()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였으며, 그 사이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 밑에서 일하는 도중, 마호메트의 성실함에 큰 감명을 받고 그녀가 구혼을 하였다. 595년 마호메트는 십여 세나 연상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으나 남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 610년경 마호메트가 40세 되었을 때, 그는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부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새로운 교()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부인 하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를 부정하고 유일신()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메카 지배층의 이익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교단()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른(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마호메트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마호메트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 등이 마호메트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627년에는 메카군()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마호메트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마호메트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마호메트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교단 형성이 완성되어,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대제()를 지내고, 마호메트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마호메트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마호메트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마호메트상()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호전()적인 마호메트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마호메트가 호색()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